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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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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우리는 늙어간다

제12회 서울노인영화제 본선 오른 65살 강혜령 감독과 27살 은고 감독
등록 2019-09-23 11:59 수정 2020-05-03 04:29
박승화 기자

박승화 기자

제12회 서울노인영화제가 9월25일부터 29일까지 서울 충무로 대한극장에서 열린다. 올해 영화제의 주제는 ‘100白BACK, #100’이다. 노인, 청년 등 다양한 세대가 ‘100세 시대’ 노년기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자는 뜻이다. 영화제에서는 노인 당사자의 시선으로, 청년의 시선으로 담아낸 이 시대 노년의 다양한 얼굴을 만날 수 있다. 특히 노인과 청년 감독들의 작품을 선보이는 단편경쟁 국내 부문에서는 노년의 삶을 바라보는 다채로운 시선을 보는 재미가 있다.
올해 노인 감독(65살 이상) 73편, 청년 감독 159편 등 총 232편이 출품돼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이 중 본선에 오른 노인 감독의 작품인 자기 삶을 영화로 기록한 (강복녀 감독), 대룡시장 주민들의 갈등과 화합을 보여주는 (조명진·최관식 감독) 등 9편과 청년 감독의 작품인 홀몸노인이 남은 삶을 정리하는 (이지은 감독), 퇴직 이후 가장의 자리를 잃어버린 아버지의 쓸쓸한 뒷모습을 이야기하는 (채수민 감독) 등 22편을 상영한다.
노인과 청년 세대가 영화로 담은 삶의 이야기는 얼마나 다르고 또 얼마나 같을까. 은 영화제를 주관하는 윤나리 프로그래머의 추천을 받아 노인 감독과 청년 감독을 만났다. 서울노인영화제가 주목한 그들, 강혜령 감독과 은고 감독의 작품 세계와 창작의 꿈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특별한 사람들만 하는 거라 생각한 영화를 제가 만들고 있네요.”(강혜령)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내 생애 첫 극영화예요.”(은고)

자신의 이름 뒤에 붙는 ‘감독’이라는 호칭이 낯선 강혜령(65)씨와 은고(27·필명)씨가 카메라 앞에 섰다. 사진 촬영을 하는 게 어색하지만 즐거운 듯 보였다.

9월16일 오후 서울노인복지센터에서 만난 두 신예 감독은 제12회 서울노인영화제 단편경쟁 국내부문에 작품을 냈다. 베이비붐 세대인 1954년생 강 감독은 노인 감독 부문, 밀레니얼 세대인 1992년생 은고 감독은 청년 감독 부문 본선에 올랐다.

노인복지센터 6주 강좌가 감독의 시작

강 감독은 영화제 기간에 을 선보인다. 삼 남매의 유년 시절을 그린 작품이다. 강 감독은 “제가 삼남매 중 맏이예요. 작품에서는 막내 5살의 시점으로 어린 시절을 추억했어요”라고 설명했다. 영화에는 그가 기억하는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시간이 담겨 있다. “밤에 전깃불이 나가면 동생 둘과 누워서 노래를 부르거나 촛불을 켜고 그림자놀이를 했어요. 그땐 물질적으로 넉넉하지 않았지만 걱정거리가 없었어요. 마냥 좋았어요. 부모님도 살아 계셨고요.” 그가 추억한 그 시절은 “노랗고 파란 꿈을 꾸던” 시절이자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했던 행복한 시절이기도 하다. 강 감독은 “엄마가 살아 계셨으면 제 작품을 보고 무척 좋아하셨을 텐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강 감독은 의 감독, 각본, 그림, 촬영, 편집을 혼자 했다. 미술을 전공한 그는 영화 속에 나오는 그림을 직접 그렸다. “어린 시절 놀던 모습을 여러 장 그렸어요. 그 그림을 사진으로 찍어 영상에 담았어요.” 영화를 보면 마치 동화책을 넘겨보는 듯하다. 윤나리 프로그래머는 “다양한 세대가 함께 동심의 세계를 떠올릴 수 있는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7분짜리 영화지만 제작하는 건 만만치 않았다. 강 감독은 영상 편집에 너무 집중하느라 눈에 실핏줄이 터졌을 정도다. 그래도 요즘 영화 만드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평생 아내, 엄마, 며느리로 살아온 강 감독은 우연한 계기로 영화에 관심 갖게 됐다. 재작년 다니던 노인복지센터에서 ‘휴대폰으로 찍는 내 생애 첫 영화’라는 강좌 알림 포스터를 보고 호기심이 생겼다. 그렇지만 ‘과연 내가 이 강좌에 등록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몇 번을 망설이다 참여했다. 6주 강좌가 끝나고 영화를 만드는 게 “재미있기도 하고 점점 더 알고” 싶어졌다. “자막도 넣고 음악도 넣는 영상 편집은 정말 요술방망이 같아요. 그걸 알고 나니 새로운 세상에 눈뜬 기분이에요.”

그다음에는 본격적으로 영화 감독반 수업을 들었다. “수업 과제로 작품을 한 편 만들어야 하는데, 고민하다가 을 만들기로 결심했어요. 미술을 전공했으니 그림을 이용해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제가 만든 영화 장르가 어정쩡해요. 배우가 나오는 극영화도 아니고, 움직이는 영상이 나오는 애니메이션도 아니죠. 그냥 내가 그림을 이용해 만든 새로운 장르죠.(웃음)”

가족의 도움을 받아 영화를 완성했다. 남편에게서 카메라 삼각대를 빌리고, 가족들이 목소리로 출연해줬다. “수업 시간에 작품을 발표하니 다른 분들이 ‘노인영화제에 출품해보라’는 이야기를 해줬어요. 그 말에 용기를 얻어 영화제에 냈어요.”

강 감독은 본선 진출 소식을 듣고 뛸 듯이 기뻤다. “선택받은 느낌이에요. 나도 이렇게 영화를 만들어도 되겠구나라는 자신감도 생겼어요.” 외국에 나가 있는 자녀들도 축하 메시지를 보냈단다. “아이들이 엄마가 바깥활동 하는 걸 못 봤는데 신기한가봐요. 유튜브에 제 작품을 올리고 조회수를 많이 나오게 해주겠다네요.”

영화제 기간에 선보이는 ‘Know-ing: 우리는 모두 영화가 된다’ 섹션에서 그가 배우로 참여한 다큐멘터리 도 상영할 예정이다. 노인 여성 11명이 60일 동안 배우가 되어가는 과정을 담은 작품이다.

강혜령 감독의 <그날 밤>(위), 은고 감독의 <수정포도>. 서울노인영화제 제공

강혜령 감독의 <그날 밤>(위), 은고 감독의 <수정포도>. 서울노인영화제 제공

외할머니와 동거로 이해하게 된 노인의 삶

은고 감독 역시 강 감독처럼 이제 막 영화를 시작한 새내기다. 영화제에 출품한 작품 는 그가 처음 만든 극영화다. 노인 돌봄 아르바이트를 하는 탈북 대학생 ‘무늬’와 그가 돌보는 할머니 ‘수완’의 만남을 주제로 했다. 올해 대구단편영화제 본선에도 진출했다. “대학 친구 중에 탈북한 아이가 있었어요. 그 아이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었고, 또 함께 사는 외할머니 이야기도 기록하고 싶었어요. 이 다른 세대의 이야기를 에 담았어요.”

은고 감독은 한 작품을 통해 노인영화제를 알게 됐다. 지난해 서울노인영화제 국내경쟁 부문에서 선보인 이다. 세상을 떠난 시인 아들의 흔적을 찾는 어머니의 여정을 보여주는 영화다. 각자 삶 속에 혼자 넘어서야 하는 인생의 ‘언덕’을 이야기한다. “그 영화를 통해 노인영화제에 관심 갖게 됐어요. 그때 제가 만든 가 이 영화제에 선보이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용기 내 영화제에 출품했어요.”

은고 감독은 함께 사는 외할머니를 통해 노년의 삶을 깊이 있게 들여다봤다. “10년 전부터 외할머니와 한집에서 살고 있어요. 떨어져 살던 때와 달리 같이 살면서 듣는 이야기가 가슴에 와닿았어요. 할머니 마음을 잘 이해하게 됐고요. 그때그때 할머니가 해준 이야기를 일기에 적었어요.” 그가 기록한 외할머니의 말을 영화에 오롯이 담았다. 대학생 무늬와 할머니 수완이 함께 오래된 사진첩을 보며 나오는 자막 역시 은고 감독 외할머니의 말이다. “괴로운 마음 누구에게도 없으니 슬픈 마음 지닌 채로 그저 선하게 살아라. 그저 무지갯빛처럼 찬란하게 살고 꽃처럼 어김없이 피어나라.”

은고 감독의 외할아버지는 실향민이다. 영화에 나오는 할머니 수완의 남편이 실향민인 것처럼. “세대가 달라도 통하는 감정이 있는 것 같아요. 가족을 그리워하는 탈북 대학생 무늬와 할머니 수완의 실향민 남편은 같은 아픔, 그리움을 갖고 있어요.”

은고 감독은 처음 극영화를 만드는 게 쉽지 않았다. 특히 저예산으로 영화를 만들다보니 배우 캐스팅이 가장 어려웠다. 주인공인 노인 배우를 찾으려고 주변 사람들을통해 영화에 출연하고 싶은 할머니를 수소문했다. 다행히 친구의 외할머니가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고 나섰다. “전문 배우가 아니지만 역할을 잘 소화하셨어요. 다른 배우들이 촬영을 쉴 때 할머니가 불편하신 건 없는지 잘 챙겨드렸어요. 할머니는 그런 배우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시기도 했고요. 촬영장 분위기가 좋았어요.”

은고 감독은 영화에서 노년을 생각할 수 있도록 대사나 자막 없이 보여주기를 주로 택했다. 특히 주인공 할머니의 모습을 찬찬히 보여준다. “몸 자체가 지닌 이야기가 있다고 생각해요. 주름살, 흰머리라든지 젊은 사람들에게 없는 나이 지긋한 분들에게서 느껴지는 아우라가 있어요. 저는 할머니의 주름진 손만 봐도 눈물이 나오고 좋아요. 몸에 새겨진 지난한 세월이 느껴져요.”

서울노인영화제 제공

서울노인영화제 제공

선물로 주고 싶은 그리움

두 감독은 서울노인영화제에서 관객이 자신의 작품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할지 기대가 된단다. 두렵기도 하지만 설레는 시간이다. 강 감독은 영화 마지막에 “마음속에 그리움을 갖고 계신 분들께 드립니다”라는 자막처럼 관객에게 잊고 지낸 그리움의 시간을 선물로 주고 싶다고 했다. 은고 감독은 “주연배우로 출연한 할머니의 가족분들이 단체 관람을 온다고 했다”며 “그분들뿐 아니라 다른 가족 관람객에게도 따뜻한 영화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그들은 다음 작품 구상도 들려주었다. 은고 감독은 노인과 아이가 등장하는 가족 이야기를 계속 하고 싶단다. “인간관계에 가장 기초가 되는 게 가족이라고 생각해요. 그 관계에서 많은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을 거예요.” 은고 감독은 인생 경력을 더욱 쌓으면 “점점 더 많은 이야기를 쓸 수 있지 않을까 기대된다”고 했다. 그에게 나이 듦은 세상에 들려줄 이야기가 더 많아진다는 의미다.

강 감독은 은고 감독처럼 20대로 돌아간다면 엄마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싶다. 외할머니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은고 감독이 부럽단다.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자신을 기록하고 아내로, 엄마의 이름으로만 살아온 다른 친구들을 영상으로 남기는 일이다. “지난해 다큐멘터리 을 찍었어요. 나를 찍은 작품이에요. 훗날 내가 없을 때 아이들이 저를 기억할 수 있게 남기고 싶었어요. 그런 식으로 다른 친구들도 찍어주고 싶어요. 같은 세대여도 다 다른 이야기가 있잖아요. 노년도 다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진 않으니까요.”

그 이야기를 듣고 은고 감독이 강 감독에게 “작품 계속 만드세요”라며 응원했다. “만약 제가 지금 영화를 안 했다면 (강혜령) 감독님처럼 나중에라도 만들었을 것 같아요.” 그도 강 감독에게서 자신처럼 세상에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은, 같은 마음을 읽었다.

언젠가 들려주고 싶은 ‘늙은 나무’ 이야기

그러자 강 감독이 이미 써놓은 시나리오 이야기를 꺼냈다. “청년과 노인 두 나무 이야기를 써놓은 게 있어요. 젊은 나무는 숲에서 가장 훌륭한 나무가 되려고 자신만 돋보이려 해요. 그와 달리 늙은 나무는 새 둥지를 만들게 하고 보듬어줘요. 늙은 나무는 젊은 나무에게 말해요. 자연과 함께 살아가고, 옆에 있는 소중한 존재를 살피는 것이 나를 살리는 일이라고요. 그걸 영화로 이야기하고 싶어요.” 강 감독의 이야기를 듣고 은고 감독이 이번에도 “감독님이 그거 꼭 영화로 만들어보세요”라고 응원했다. 두 감독이 마주 보며 활짝 웃었다.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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