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길양(朴吉陽)은 옥중에서 죽었다. 34살, 한창나이였다. 1928년 1월19일 겨울날 새벽 6시 서대문형무소 차디찬 철창 속에서 숨을 거뒀다. 사인은 폐병이라 알려졌다. 두 달 전부터 병세가 악화됐던 것 같다. 재판 중인데도 재판정에 출석하지 못했다. 그는 1927년 12월7일 이후로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담당 변호사 김병로와 이인이 12월16일 자로 병보석을 신청했다. 질병 치료를 위해 구속 중인 피고인을 석방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조선총독부 판사들은 좀체 보석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사상범인 경우 더욱 그러했다. 그런데 웬걸, 얼마나 위급했을까. 1월18일 오후 3시께 급기야 보석이 허용됐다. 야모토 재판장도 피고인 상태가 위중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나보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박길양은 출옥 예정일 새벽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젊은 아내의 분명한 뜻 “화장은 안 된다”박길양은 ‘조선공산당 재판’의 피고인이었다. 재판은 1927년 9월13일부터 이듬해 2월13일까지 5개월간 계속된, 조선총독부 경성지방법원이 담당한 형사재판이었다. 피고인 수가 101명이라 ‘101인 사건’이라고도 한다. 일본 강점 초기에 벌어진 ‘105인 사건’과 더불어 일제 식민지 시대의 대표적인 항일 비밀결사 사건이었다.
수사와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피의자와 피고인이 속속 죽어나갔다. 기자 박순병이 1926년 8월25일 사망했다. 동래지국장이자 조선노동공제회 상무간사이던 백광흠은 1927년 12월13일 숨을 거뒀다. 박길양에 뒤이어 연희전문학교 학생 권오상이 1928년 6월3일 죽었다.
이들의 사인은 질병 탓이라고 발표됐다. 맹장염, 건성늑막염, 결핵성복막염, 폐병 따위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진실을 알고 있었다. 건강하고 원기 넘치던 청년들이 경찰에 체포된 뒤 얼마 안 돼 죽을병에 걸리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야만적 고문’ 탓이었다. 못 견딜 가혹행위에 ‘학살’된 것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박순병 동무는 경찰서에서 학살당하고 백광흠·박길양 동무는 감옥에서 참사됐다”고 인식했다. 희생자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슬픔과 분노가 일었다. 희생자들을 잊지 않으리라. 그 희생이 헛되지 않게 하리라. “혁명가 한 사람이 희생한 터에는 그 위에 새로이 열렬한 혁명가 열 사람 이상이 솟아나느니라”고 속다짐했다.
장례식은 그렇게 마음속 결의를 다지는 자리였다. 박길양이 숨을 거둔 이튿날, 합법적 공개 영역에서 활동하는 사회운동가 40여 명이 모였다.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30개 단체가 참여했다. 노동총동맹·농민총동맹·청년총동맹 등 전국 규모의 대중단체를 비롯해 신간회·근우회 등 민족통일전선 단체가 포함됐다. 대표자들은 장례식을 ‘사회단체연합장’으로 치르기로 결의하고, ‘장의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재정부·장례의식부·서무부 등 집행부서가 만들어져 장례 준비를 착착 해나갔다.
경찰은 이를 가만두지 않았다. 박길양 장례식이 반일운동의 상징이 되도록 방관하지 않았다. 사회단체연합장을 금지하고 오직 가족장으로 치르는 것만 허용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장례식 세부 절차에 하나하나 개입했다. 경찰은 매장이 아니라 화장을 종용했다. 그의 죽음이 사회적 추모와 저항의 표상이 될 가능성을 애초부터 제거하려 했다. 하마터면 그렇게 될 뻔했다. 그러나 젊은 아내 김씨 부인이 맞섰다. 화장이 아니라 매장을 원한다고 분명히 했다. 그는 삼엄한 경찰의 심리적 압박에 굴하지 않는 용감하고 지혜로운 여성이었다. 식민지 국가 폭력은 30살 전후의 젊은 여성에게서 배우자를 빼앗아갔다. 그에게는 어린 남매가 있었다. 아비 없이 자라야 할 어린 승문과 승희를 키우는 것은 온전히 그 혼자만의 몫이 됐다. 기가 막힐 일이었다. 김씨 부인은 기자에게 말했다. “그저 한 많은 일생이었지요. 살아 있을 때 한 번이라도 더 보았더라면 할 뿐이외다.” 그는 목이 메어 말끝을 맺지 못했다.
1월22일 장례식 날, 발인 장소는 서대문에 있는 노동총동맹 회관이었다. 정사복 경관 30여 명이 식장을 에워쌌다. 종로경찰서 오모리 순사부장이 현장을 지휘했다. 경찰은 장지로 향하는 상여 뒤로 오직 가족만이 뒤따르게 했다. 장례식에 참여하려 모여든 조문객 200여 명은 해산을 종용받았다. 가족이라야 오직 한 사람이었다. 고인의 아내만이 “애끓는 눈물로 얼굴을 적시면서” 상여를 뒤따랐다. 그 곁에는 친정 남동생 김근호만이 동행할 수 있었다. 명정이나 조기, 만장 등도 들지 못했다. 동지를 영결하려던 조문객들은 삼삼오오 짝지어 100m 혹은 200m 멀찌감치 떨어진 채 말없이 상여를 뒤따랐다.
서울 능가한 강화도 3·18 시위운동장지는 수철리 공동묘지였다. 광희문 밖 4㎞ 지점에 있는데 오늘날 행정구역으로는 성동구 금호동에 해당한다. 경찰 기록에 따르면 장의 행렬은 종로, 동대문, 광희문, 신당리를 거쳐 수철리에 이르렀다. 장지까지 따라온 조문객은 28명이었다고 한다.
박길양은 피부가 하얗고 눈이 큰 청년이었다. 곱상한 외모였다. 키는 164㎝, 당시 기준으로 성인 남성 평균쯤 되는 몸집이었다. 하지만 겉모습과 달리 행동거지는 과감하고 단호했다. 정신도 열렬했다. 그는 저 유명한 강화도 3·1운동의 능동적인 참가자였다. 1919년 3월13일 부내면 장날에 시작된 강화도 3·1운동은 4월12일까지 한 달 내내 계속됐다. 이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3월18일 강화 읍내 시위였다. 이날 시위에 무려 2만여 명이 참가했다. 놀라운 수였다. 당시 강화군 인구는 7만2천여 명이었다. 시위 참가자는 군내 전체 인구의 28%에 이르렀다. 부속 섬에 사는 수를 제외하면 3명 중 1명꼴로 시위에 가담한 셈이다. 3·1운동기에 일어난 전국 모든 시위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람이 참여한 시위였다. 경찰 집계를 보면 참가자가 가장 많은 최대 시위는 강화도 3·18 시위(2만 명)이고, 그다음이 경남 합천 3·23 시위(1만 명)와 서울 3·1 시위(1만 명)였다.
박길양이 강화도 3·1운동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유감스럽게도 구체적인 정보는 발견되지 않았다. 강화도에서 3·1운동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체포돼 재판에 회부된 사람은 45명이고, 그중에서 35명이 징역 또는 태형을 받아 고초를 겪었다. 박길양이란 이름은 거기에 없다. 그는 요행히 경찰에 체포되지 않았던 것이다.
만세시위운동이 퇴조하자 박길양은 새 방향을 모색했다. 시위운동이 불가능한 조건에선 무장투쟁을 벌이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독립군자금 모금에 뛰어든 것은 그 까닭이었다. 그는 경기도와 삼남 일대를 돌아다니며 군자금 모금에 헌신했다. 그러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1년6개월간 징역살이를 했다. 그는 ‘열렬한 독립운동자’였다.
옥살이를 마치고 출감한 박길양은 해방투쟁을 위한 새로운 이론과 방법에 눈떴다. 사회주의 사상이 그것이다. 민족해방을 위해서는 민중을 조직화·의식화해 스스로 혁명운동 주체로 나서게 돕는 것이 지름길이라 인식했다. 거족적인 혁명을 일으켜 식민지 체제를 전복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는 대중운동 속으로 뛰어들었다. 합법적 사회단체 활동에 참여함과 동시에 공산주의 비밀결사에도 가담했다.
박길양은 청년운동에서 미래 비전을 보았다. 청년을 조직하고 계몽하는 일에 열성을 보였다. 먼저 강화군 부내면의 양대 청년단체를 통합해 강력한 단일 청년단체를 만들었다. 1924년 3월 창립한 강화중앙청년회가 그것이다. 그는 이 단체의 간부로 선출돼 여러 활동을 전개했다. 강화군 내 웅변대회를 열고, 강화청년단체 연합 육상경기대회를 주관하며, 경성에 유학 중인 강화 출신 학생들의 여름 순회 강연을 주최하고, 교육 기회를 놓친 청년층을 위해 야학을 만들었다.
비밀결사에도 가담했다. 합법 공개단체의 역량은 한계가 있었다. 실정법 안에서만 활동해야 했기 때문이다. 박길양은 고려공산청년회에 들어갔다. 강화도 내에 공청 세포단체를 조직하고 그 비서가 되었다. 중앙 상층부 논의 테이블에도 진출했다. 1925년 4월18일 경성 시내에서 비밀리에 열린 고려공산청년회 창립대회에 대의원 자격으로 참석했다.
그러나 비밀결사는 탄로 나기 쉬운 위험한 운동이었다. 1925년 12월 초였다. 박길양은 일본 경찰에 비밀결사 가담 혐의로 체포됐다. 경성 종로경찰서에서 파견된 경찰대에 포박당했다. 자신의 과오 때문이 아니었다. 멀리 신의주에서 일어난 어처구니없는 우연적인 사건 때문에 공청의 비밀이 누설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박길양의 생애 두 번째이자 마지막 감옥살이의 막이 올랐다.
미완의 꿈, 강화도로봄이 왔다. 언 땅이 녹고 만물이 소생하기 시작했다. 1928년 4월9일, 박길양이 죽은 지 석 달쯤 지난 때였다. 아침 일찍부터 그의 고향 친구와 동지 10명이 수철리 묘역을 찾았다. 무덤을 이장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벗의 주검을 고향에 묻으려 했다. 가족의 뜻이기도 했다. 수철리 묘지에서 한강변 용산나루까지는 옛 친구 10명이 직접 상여를 메고서 운구했다. 상여를 멘 채 보조를 맞춰 8㎞쯤 떨어진 용산까지 이동했다. 거기에 배를 한 척 정박해놓았다. 강화도까지 한강 수로를 이용해 관을 옮길 터였다.
주검을 담은 목관에는 ‘고백평박길양지영구’(故白萍朴吉陽之靈柩)라고 쓰인 명정을 둘렀다. ‘백평’은 박길양의 아호였다. 상여 실은 배는 한강 물길을 따라 서서히 움직였다. 그리하여 4월10일 오후 1시 강화도 월곶 나루에 닿았다. 가족, 친구, 친척, 동지들이 그를 맞았다. 강화도는 물론이고 서울과 인천 등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경찰도 있었다. 조문객보다 정사복 경찰이 더 많아 보였다. 행여 분노에 찬 군중이 불온한 움직임이라도 보일까봐 강화경찰서 병력이 총동원됐던 것이다. 장지는 갑곶리 공동묘지였다. 그날 저녁 늦게야 하관이 이뤄졌다. 저녁 8시였다. 묘역 한쪽에 새로 꾸민 봉분이 들어섰다. 고문에 희생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박길양의 유택이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미국 최고 의사’ 84살 김의신 “암에 좋은 음식 따로 없어, 그 대신…”
“명태균에 아들 채용 청탁…대통령실 6급 근무” 주장 나와
“대통령 술친구 이긴 ‘김건희 파우치’…낙하산 사장 선임은 무효”
법원, KBS 박장범 임명 효력정지 가처분신청 기각
탄두가 ‘주렁주렁’…푸틴이 쏜 ‘개암나무’ 신형 미사일 위력은
‘야스쿠니 참배’ 인사 온다는 사도광산 추도식…‘굴욕 외교’ 상징될 판
관저 유령건물 1년8개월 ‘감사 패싱’…“대통령실 감사방해죄 가능성”
‘1호 헌법연구관’ 이석연, 이재명 판결에 “부관참시…균형 잃어”
“회장 자녀 친구 ‘부정채용’…반대하다 인사조처” 체육회 인사부장 증언
꺼끌꺼끌 단단한 배 껍질…항산화력 최고 5배 증가 [건강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