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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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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겪은 여성들 ‘비극의 기록’

1945년 베를린 함락 당시 여성들의 비참한 삶 <함락된 도시의 여자>
등록 2018-11-23 11:00 수정 2020-05-03 04:29

1945년 4월20일. 56살의 히틀러는 마지막 생일을 맞았다. 독일 패전이 확실시되고 있었다. 베를린 거리는 러시아군의 대포 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살던 집이 폭격 맞아 동베를린에 있는 지인의 다락방집에 살게 된 ‘익명의 여성’은 이날부터 노트를 펼쳤다. “베를린이 처음으로 전쟁의 얼굴을 본 그날, 기록을 시작하다.” 이렇게 시작된 일기는 6월22일까지 두 달 동안 베를린에서 벌어진 일을 ‘철저하고 공정하게’ 묘사한다. 그 기간에 히틀러는 자살했고(4월30일), 러시아군은 베를린에 입성했으며(5월2일), 미·영·프·소 4개국은 승리를 선언했다(6월5일). 날마다 방공대피소에 모여 두려움에 떨던 베를린 시민들은 무정부 상태가 되자 굶주림을 참지 못하고 경찰서와 관청 등을 약탈했다. 이 일기는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던 당시 베를린의 비극에 대한 완강한 침묵의 벽을 허문다. 당시 베를린에 있던 270만 명 중 200만 명이 여성. 라일락 피어나는 계절에 베를린에 온 소련군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여성들을 겁탈했다. 10대 소녀부터 노파까지 두려움에 떨었고, 지은이도 예외가 될 순 없었다. 남성 대다수는 무력하거나 이중적이다. 아내가 성폭행당하는 사이 숨은 이도 있었고, 자기와 직접적 관련이 없는 여성은 소련군에 내주기까지 했다. 징집됐다가 살아 돌아온 지은이의 남자친구조차 “너희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암캐로 변해버렸어”라고 꾸짖고, 연인의 일기에 적힌 ‘겁탈’이란 단어를 읽고는 곧 떠나버린다.

이 일기를 엮은 책 (마티 펴냄)의 놀라운 점은 이 짐승의 시간 와중에도 지은이가 유지한 명철함과 관찰력이다. 몇몇 소련군은 러시아어 소통이 가능한 지은이에게 섹스 이상의 감정을 갖고 그의 곁을 맴돈다.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라는 사실을 절감한 그는 “다른 온갖 늑대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되도록 지위가 높은 늑대를 불러들여야겠다”고 결심하기에 이른다. 임시로 같이 살던 중년의 남녀 동거인들은 식량을 얻기 위해, 소련군 간부가 매일 밤 지은이의 문을 두드리길 고대한다.

여자들끼리 만나면 “너는 몇 번 당했어?”라는 질문이 오갈 정도로 끔찍한 상황이지만, 지은이는 새삼 여성의 강인함을 깨닫는다.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나치에 가담했거나 국민방위대에서 도망친 남자들은 여자의 치맛자락 뒤에 숨어 지낸다. “여자들을 지배하던 남자들, 강한 남자를 찬미하는 나치 체제가 흔들리고 있다. 나아가 남성이라는 신화가 무너지고 있다. 이 전쟁이 끝나면 수많은 패배와 더불어 남자들의 패배도 찾아올 것이다.” 남자들이 두려움과 혼란에 휩싸인 사이 여자들은 상황을 직시하고 유연하게 대처한다. “우리 여자들이 추락을 더 잘 견뎌내며,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또다시 확인했다.”

참혹한 기억을 기록하는 행위임에도, 글쓰기를 통해 그는 아픔을 이겨낸다. “글쓰기는 고독하게 지내는 나에게는 위안이고 유일한 대화이며 속마음을 털어놓는 일이다.” 아주 나중에야, 일기의 주인은 여기자 마르타 힐러스(1911~2001)로 밝혀졌다.

이주현 문화부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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