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이 2025년 3월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 동십자각 일대에서 연 ‘100만 시민 총집중의 날’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윤석열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즉각 파면을 촉구하며 종로3가 방향으로 행진하고 있다. 한겨레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윤석열 탄핵은 내란사태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점이어야 한다. 더 나은 한국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성찰과 방향, 밑그림, 과제 등에 대해 진보적 필자들의 연속 기고를 싣는다._편집자
벌써 넉 달째다.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기가 고달프다. 무엇 하나 순조롭게 넘어가는 법이 없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으로 현실은 비현실적인 막장의 연속이다. 남태령과 한강진의 눈물겨운 밤들, 응원봉 부대와 말벌 시민의 빛나는 출현도 있지만, 서울서부지방법원 폭동과 헌법재판소 테러 위협이 난무하고 극우 세력이 맹위를 떨치는 현재 상황은, 단맛, 쓴맛, 짠맛, 매운맛이 극강으로 어우러지는 독한 맛의 절정이다. 하루하루 예사롭지 않은 추이 속에서 짙은 절망과 간절한 희망이 수시로 교차한다. 이 혼돈의 시대에 우리는 어떤 좌표를 찍고 어떤 항로로 나아가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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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계엄이 선포됐을 때 많은 이의 한결같은 의문은 “대체, 왜?”였다. “대체 왜, 대통령이란 자가, 뜬금없이, 구닥다리 유물창고에나 박혀 있을 것 같던 계엄포고령을?” 항간에는 그가 술에 취해, 혹은 점술가가 찍어준 ‘왕(王) 자 길일’을 택해 계엄을 선포했을지 모른다는 소문마저 돌았다. 그만큼 상식적인 잣대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돌출 행동이었으니까. 그러나 차근차근 돌아보자.
‘명태균 게이트’라는 다이너마이트의 뇌관이 코앞에서 타들어가는 상황이었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은 검찰 조사에서, “지난해 11월24일 대통령이 명태균 공천개입 사건을 언급하면서 ‘비상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을 들었다”고 진술했다. 여러 차례 대통령실에 협박성 구조신호를 보냈던 명태균은 계엄 하루 전인 2024년 12월2일 “황금폰이 있다면 국민이나 민주당에 제출하겠다”며 압박 수위를 높였고, 계엄 당일 오후 6시 “명태균을 기소해 공천 대가 뒷돈이나 받아먹는 잡범으로 만들어 ‘꼬리 자르기’에 들어갔다”며 “특검을 요구한다”는 옥중 입장문을 냈다. 그날 밤, 윤석열은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명태균 게이트는, 2024년 1월, 10월, 11월 세 차례나 김건희 특검법에 거부권을 행사해온 윤석열을 막다른 길로 내모는, 말 그대로 ‘헬(Hell) 게이트’였을지 모른다. 일파만파로 번질 김건희 공천개입 리스크와 씨름하느니, 차라리 헌정질서 자체를 마비시켜 군주적 권력을 확립하는 것이 윤석열에겐 최후의 승부수, 최선의 보신책이었을 것이다. 윤석열의 친위쿠데타는 위험을 무릅쓰고 모여든 시민들과 국회의 항거로 멈춰섰지만, 윤석열의 내란은 하룻밤의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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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극우 유튜브를 경전처럼 암송하며 체포영장에 불복하고 관저농성을 벌이는 동안, 극우세력은 차곡차곡 세를 불렸다. 국민의힘 주류는 사이비 교주에 불과한 극우파 보스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헌정 수호의 기본사명마저 반납했다. 국민의힘과 장외 극우세력의 결합은 2017년 촛불항쟁 때와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필요에 따라 손절할 수 있는 물리적 동맹이 아니라 보수 여당의 정체성을 형질전환시키는 화학적 결합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중국 해커설을 터뜨려 “모두가 나에게 속았다”고 의기양양해하는 ‘캡틴아메리카’ 안병희의 거침없는 허언증 고백에도 불구하고 부정선거 음모론, 중국 개입설, 북한 결탁설을 반박하고 나서는 여당 의원은 거의 없다.
윤석열이 노린 게 바로 이것이었을까? 광신적 극우 집단을 친윤 체제에 착종시켜 정치세력화하는 것? 불신과 증오의 내전을 유도해 자기 권력의 지분을 항구화하는 것? 윤석열의 꼼수가 실패했다고 단언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윤석열이 퍼뜨린 내란과 내전의 불씨는 좌절과 울분에 찌든 사람들의 취약함을 숙주로 은밀하고도 맹렬하게 번져가고 있다. 헌법재판소 탄핵심판 이후에도 우리가 넘어야 할 고개는 거칠고 가파르다.
2025년의 광장은 2017년의 광장과 다르다. 박근혜 대통령이 헌재 결정으로 파면됐을 때, 우리는 그것을 ‘위대한 시민의 승리’로 여겼다. 거대한 촛불의 힘으로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룬 쾌거를 자랑스러워했다. 지금은 다르다. 헌재 결정 이후 우리에게 보장된 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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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가 윤석열 파면을 촉구하며 ‘민주주의의 회복’을 염원한다. 헌정질서를 바로 세우자는 데 이견이 있을 리 없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세울 민주주의와 헌정주의는 계엄 이전으로 돌아가는 ‘회복’에 머물러선 안 된다. 12·3 계엄은, 1987년 이후 우리가 애써 일궈왔다고 자부한 민주주의가 얼마나 취약하고 허술한 것이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는 점에서 충격이다. 자유주의는 여전히 반공 이데올로기의 포장지로나 존재하고, 법치주의는 법기술자들의 성역이 됐으며, 공화주의는 공화국에서 사라졌다. 회복이 아닌 민주주의의 전면적 재구성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 제7공화국 개헌을 해야 한다.

1987년 6월 민주 항쟁에 참가한 시민들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외치고 있다. 한겨레 자료.
개헌은 시기상조라며 지금은 탄핵에 집중해야 한다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광장의 요구는 윤석열 퇴진과 사회대개혁이다. 퇴진은 사회대개혁의 출발점이지 최종 목표가 아니다. 개헌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사회대개혁의 폭과 깊이, 속도를 상징하는 깃발이다. 개헌이 있으면 그에 따라 관련 법과 정책을 전면적으로 재정비해야 한다. 정당법과 공직선거법, 자치분권, 사회적 안전망과 국가돌봄체계가 대대적으로 혁신돼야 하고, 생명과 생태에 대한 국가 책임, 차별과 혐오 없는 존엄과 평등을 보장해야 한다. 더 이상 ‘나중에’ 하자고 미룰 일이 아니다. 항해의 목표를 분명히 해야 노 젓는 팔에 힘이 붙는다.
개헌은 블랙홀이라는 우려도 있다. 개헌 논의가 중구난방 쏟아져 나오면 소모적 정쟁에 빠지리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개헌 블랙홀보다 더 현실적인 위험은 조기대선 블랙홀이다. ‘어떤 미래를 만들 것인가’가 아니라 ‘누가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인가’에 모든 논의가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가면 제2, 제3의 윤석열을 막을 수 없다.
‘개헌 물타기론’을 경계한다. 계엄에 찬성하는 국민의힘이나 윤석열마저 개헌을 입에 올리고 있으니 그 페이스에 휘말려 자칫 무익한 개헌 코스프레로 끌려가면 안 된다는 의견에 동의한다. 개헌은 국가의 기초부터 리셋하자는 것인데, 대통령 4년 중임제나 국무총리 국회선출권 정도로 개헌 흉내만 내는 ‘땜빵’으론 체제의 취약성을 해결하지 못한다. 개헌은 오랫동안 미뤄왔던 패러다임 전환의 기폭제가 돼야 한다.
“헌법에 문제가 있어서 윤석열이 계엄을 했냐?” “헌법 고친다고 민주주의 되냐?”는 반박은 헌법이 시대정신의 표석이라는 중요성을 간과한 주장이다. 대화문화아카데미가 지난 19년간의 논의를 집대성하고 개정을 거듭해 내놓은 ‘2025 새헌법안’에서는 ‘국민의 권리’를 ‘모든 사람의 기본권’으로 바꾸고 ‘국회’를 ‘입법부’로 ‘정부’를 ‘집행부’로 변경했다. 전문과 총강에서는 ‘지구생태계 보전을 통한 미래세대에의 책임’을 명시하고 ‘대한민국이 지방분권국가’임을 선언했다. 이름을 붙여야 존재가 산다. 헌법에 담긴 명칭과 가치가 시대의 표준이 된다.
문제는 이행 로드맵이다. 광장은 다양하고 다채로운 요구와 희망으로 넘실댄다. 현실에 존재했으나 제도정치권에서 제 몫의 발언대를 얻지 못해 투명인간이 됐던 시민들이 서로를 격려하고 응원하고 연결과 연대의 온기를 나눈다. 다름의 공존이 얼마나 평화로울 수 있으며 수평의 연결이 수직의 권력보다 얼마나 더 강력할 수 있는지 몸으로 배우는 시민학교이다.
바로 100여m를 사이에 두고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핏대 높여 탄핵 반대를 외치는 극우 집회의 인파도 만만치 않다. 헌재의 시간이 끝난 뒤 우리는 이들과 어떻게 다시 만날 것인가? ‘한심한 인간들, 싹 쓸어버리자!’라는 치기로는 해결이 안 된다. 첫째 현실성이 없다. 강제로 쓸어버린다고 사라지지 않으니까. 둘째 우리 자신을 망친다. ‘적을 소탕하기 위한’ 전투 모드는 안팎을 구별하지 않는 폭력이 될 수도 있으니까. ‘윤석열을 반대하면 빨갱이’라는 논리와 ‘이재명을 비판하면 수박이고 국민의힘 편’이라는 논리는 색깔만 다르지 모양은 같다. 윤석열의 방법으로 윤석열을 극복할 수는 없다. 우리에겐 광장의 방식이 필요하다.
광장의 싱싱한 생명력과 다양한 열망을 어떻게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제도화할 것인가? 증오와 적대의 심리적 내전을 극복하고 어떻게 평화로운 공동체성을 확보할 것인가? 차기 정부가 해야 할 가장 중차대한 임무는 광장의 요구를 제도로 보장하기 위한 기초 수립을 제1의 사명으로 삼는 것이다. 개헌 과도정부로서 제7공화국 수립의 모태가 되겠다는 선언이 필요하다.
개헌은 한두 달 만에 끝날 일도 아니고, 거대양당과 그 위성정당으로 의석을 얻은 정당들에 맡겨둘 일도 아니다. 짧게는 1년, 길면 2년 정도의 충분한 숙성시간을 두고 개헌안 초안을 마련할 시민평의회를 구성해야 한다. 성별·연령별·지역별 비례원칙에 따라 추첨으로 뽑힌 보통 시민들이 전문가를 불러 학습하고 논쟁하고 숙의하고 전국 각지를 돌며 시민토론회와 공청회를 열어 개헌안의 뼈대를 잡아야 한다. 그 초안을 국회에 부의하고 국민투표로 의결해서 제7공화국의 문을 열어야 한다.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장 현실적인 길이다. 각자의 우물 속에서 확증편향에 빠져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않는 음모론자들까지 투명하고 개방적인 공론장으로 끌어내야 한다. 그게 내전을 잠재우고 합리적 통합으로 이끄는 길이다. 지금 우리가 기댈 것은 선량한 군주가 아니라 지혜로운 시민의 힘이다.
이진순 성공회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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