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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과 해달, 인생을 말하다

곰돌이 푸와 해달 보노보노가 출판시장의 강자로 떠오른 이유
등록 2018-09-16 20:21 수정 2020-05-03 04:29
RHK출판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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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 푸와 해달 보노보노,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 둘 다 눈이 점이다. 표정이 거의 없다. 느리다. 푸가 꿀을 먹을 때만 빼고. ‘정상’ 가족은 없고 친구는 있다. 푸는 독거, 보노보노는 엄마가 없다. 둘의 친구들 사정도 비슷하다. 푸나 보노보노나 별 시시한 걸 다 재밌어한다. 이들이 사는 숲에는 경쟁과 평가가 없다. 그리고 이 오동통한 곰과 해달은 출판계의 절대강자다.

‘맹물’ 같은 이 두 동물의 위로는 강력했다. 두 권이 여섯 달 새 55만 부가 나갔다. 저자 이름은 그냥 ‘곰돌이 푸’다. 지난해 김신회 작가가 쓴 에세이 가 14만 부를 훌쩍 넘기더니 에 이어 가 잇따라 나왔다. 원작자 이가라시 미키오가 30년 동안 그린 에피소드 중에 골라 편집한 만화책 과 은 석 달 새 각각 1만여 부씩 팔렸다.

<font size="4"><font color="#C21A1A"> 책을 캐릭터 상품으로 소비하는 세대 </font></font>
RHK출판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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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와 보노보노의 재림, 그 낌새는 있었다. 지난해 백영옥 작가의 이 길을 트며 베스트셀러가 됐다. 추억의 힐링 캐릭터를 찾아라. 출판사 알에이치코리아 편집팀이 한 손에 꼽은 게 곰돌이 푸였다. A. A. 밀른이 1926년 발표한 동화를 디즈니가 1977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고, 지금 한국 20~30대는 어린 시절 텔레비전에서 푸를 만났다. 최경민 편집자는 “푸는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이미지에 좋은 말까지 갖춘 캐릭터”라고 설명했다. 일본판 푸 책을 번역한 뒤 ‘가르치려는 투’는 모조리 뺐다. 대상 독자인 2030에게 중요한 건 ‘공감’이기 때문이다.

1986년 일본에서 태어난 보노보노는 1995년 한국에 도착, 이후 투니버스 등에서 만화영화로 인기를 누렸다. 과 을 펴낸 거북이북스의 심상진 편집자는 “성공한 사람들의 금언이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 삶을 행복하게 꾸리고 있는 옛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는 재미가 있다”며 “어린 시절에는 귀여운 줄만 알았는데 자라서 보니 다른 깨달음을 줘 놀랐다는 독자가 많다”고 말했다.

예쁘다. 책이냐? ‘너무 예쁘기만 하다’고 할 수도 있다. 곰돌이 푸 책은 그림책에 가깝다. 경구 한 줄이 한 페이지를 차지한다. 그에 대한 설명을 서너 줄 옆 페이지에 붙이는 식이다. 책 첫 장에는 선물하기 좋게 ‘~에게 드립니다’란을 뒀다. 이 문구는 과 에도 있다. 모두 성인 손바닥만 한 크기에 200여 쪽 두께다. 알에이치코리아의 최두은 팀장은 “책이 너무 연성화됐다는 비판 알고 있다”며 “그런데 책의 가치가 꼭 텍스트에만 있을까, 독자가 받아들이기 쉬운 좋은 콘텐츠를 제공한다면 책의 역할을 하는 것 아닐까”라고 말했다. “이제까지 책을 바라보는 시선은 가볍지 않았다. 독서는 레저가 아니라 지혜를 탐구해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책을 열심히 읽는 사람들은 계속 읽는다. 그 시장은 작다. 이제 책을 캐릭터 상품으로 소비하는 세대도 분명히 있다고 판단했다.”(최두은)

곰돌이 푸가 하는 말, 허투루 듣지 않는 독자들이 있다. 많다. 소셜네트워크에 푸가 한 말을 받아적는다. “귀욤귀욤..소확행!...매우 공감”(항상 웃는 남자) “짧지만 나를 다잡을 수 있어”(달달부부) 푸 대사에 니체나 공자의 말을 섞었다는 책 내용은 이렇다. “나를 사랑한다면 어쨌든 즐겁게 살 수 있어요.” “나를 향한 비난에 나를 맡기지 마세요.” “나의 길은 나만이 정할 수 있어요.” “행복은 우리를 바라보고 있어요.” “느리더라도 조금씩 앞으로 걸어가봐요” “좋은 관계를 원한다면 먼저 상대를 생각해보세요.” 남한테 휘둘리지 말고, 남을 휘두르려 하지도 말고, 자기 속도로 살자는 이야기다. 곰돌이 푸가 사는 방식이 그렇다. 사랑이 넘치는 돼지 피글렛, 우울증 당나귀 이요르, 에너지 과잉 탓에 꼬리로 뛰어다니는 호랑이 티거, 유식하지만 철자법 다 틀리는 올빼미 아울이 홀로 또 같이 산다. 이요르한테 왜 처져 있냐고 따지지 않고, 푸한테 꿀은 왜 그렇게 먹어대냐 타박도 하지 않는다. 이 친구들한테는 “‘멋진 하루를 보냈어’라고 말할 수 있는 삶”이면 족하다.

<font size="4"><font color="#C21A1A">해괴한 것에서 재미 찾는 기쁨 </font></font>
거북이북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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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노보노가 사는 숲도 비슷하다. 말끝마다 “그치?”를 붙이는 다람쥐 포로리, 심술쟁이 같은데 은근히 정이 깊은 아메리카너구리 너부리, 말도 표정도 없는 프레리독이 다들 자기만의 질문을 던지며 산다. 넌 왜 그런 이상한 질문을 하냐 따위는 이 숲에서 물으면 안 된다. 보노보노는 이런 식이다. “나는 걷다가, 갑자기 멈춰 서서 아아, 여름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아아, 여름이구나 하고 생각하는 건 굉장히 좋구나.” 그러고는 친구들한테 “여름이구나 하고 생각할 때 뭘 하는지” 묻고 다닌다. 포로리는 양쪽 팔을 왼쪽으로 쪽 뻗는다. 야옹이 형은 나무 사이 풍경을 본다. 끝! 왜 여름이 왔는데 그따위 행동을 해 따위는 이 숲에서 따지면 안 된다. 말 없는 프레리독은 또 이런 걸 곰곰이 생각한다. “봄의 가장 좋은 점은 봄이 왔다는 것이다. 봄은 어느 쪽에서 올까?” 그렇게 프레리독의 모험이 펼쳐진다. 위험에 빠진 프레리독을 구하려고 포로리는 창피와 치욕을 무릅쓰고 프레리독을 괴롭히는 무리에게 “돌돌 말린 부끄러운 발(사실은 귀여운)”을 보여주고, 그런 천신만고(?) 끝에 프레리독은 봄이 남쪽으로부터, 천,천,히, 천,천,히 오는 걸 알게 되고, “천천히 오는 건 역시 굉장해”라고 생각한다.

이 친구들은 별별 해괴한 것에서 재미를 발견한다. “내 파도타기는 파도타기를 하는 것처럼 안 보여서, 재미있다고 아빠가 말한 적이 있다. 바다에 등을 돌린 채, 파도를 등으로 받아내는 놀이도 재미있다. 그다음 잠깐 죽은 척을 한다. 아아 재미있다.” 심상진 편집자는 “보노보노가 스스로 납득할 때까지 자기 나름의 생각을 정리하는 데 시간을 들이다보면 놀이가 아닌 것이 놀이가 되고 목표가 아닌 것이 목표가 된다”며 “사회생활을 하면 목표나 평가가 이미 정해진 경우가 대부분인데, 숲속 친구들한테는 저마다 기준이 있는 걸 보면 마음을 놓고 쉴 수 있는 곳을 찾은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빨간앙마’는 블로그에 “이상하게 곱씹게 된다”고 썼다.

보노보노 친구들은 푸 패거리보다 어두운 구석이 있는 녀석들이다. 그런데 그 ‘어두운 구석’은 해결해야 할 문젯거리가 아니다. 그냥 그대로, 함께 지켜본다. 너부리가 코딱지를 파고 있다. 같은 곳을 빙글빙글 돈다. 멍하니 앉아 다리를 흔든다. 이상하다. 사랑에 빠진 거다. 곧 실연한다. 보노보노는 모래 위에 돌 한 개를 빙 둘러 동그라미를 그린다. 그러자 그 돌이 특별해진다. 그리고 돌을 치운다. 동그라미만 덩그러니 남는다. “아아, 이런 기분이구나.” 실연 뒤에 너부리는 애완동물로 애벌레를 키운다. 애지중지한다. 애벌레가 사라진다. 너부리는 애벌레를 찾아 헤매다 포기한다. “애벌레는 돌아오지 않았다. 너부리는 그래도 상관없는 모양이었다. 이 숲에 아는 이가 하나 늘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 후 너부리는 비슷한 벌레를 발견하면 애벌레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작은 소리로 인사한다.” 다람쥐 포로리는 부모님 병간호에 지쳐 있다. 보노보노 엄마는 친구를 잃은 슬픔 때문에 바닷속에서 나오지 않는다. 너부리가 어릴 때 아버지가 안 계시더니 아버지가 돌아오자 어머니가 집을 나갔다. “보노보노에는 온갖 가족 형태, 온갖 캐릭터가 나오지만 모두가 정말 자연스럽게 섞여 산다.”(심상진) 같이 있지만, 홀로 있을 수도 있게 해주는 친구들이다.

<font size="4"><font color="#C21A1A">굳이 해결하려 애쓰지 마라 </font></font>
거북이북스 제공

거북이북스 제공

푸, 보노보노, 옛 친구들의 귀환은 이어진다. 알에이치코리아가 지난 7월 내놓은 는 4만 부가 팔렸다. 이어 미키마우스 2종을 선보일 예정이다. 보노보노 30주년 기념 명언집도 나온다.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이들이 어른이 돼버린 옛 친구의 굽은 등을 다독인다. 옛 만화영화 의 한 장면처럼. 푸가 친구 크리스토퍼 로빈과 함께 있다. 푸는 반딧불이를 쫓는 데정신이 팔렸다. 로빈이 말한다. “내일 우리가 같이 없더라도 네가 꼭 알아야 할 게 있어. 너는 네가 아는 것보다 용감하고, 보기보다 강하고, 네 생각보다 더 똑똑해.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우리가 헤어지더라도 나는 항상 너와 함께 있어. 언제나.”

김소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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