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숙열 이프북스 대표가 오드리 로드(1934~1992)를 만난 때는 1984년 가을, 미국 뉴욕 헌터칼리지에서였다. 같은 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여성과 정치변화’ 강의에 게스트로 나온 로드는 유 대표가 쓴 ‘황인종 여성이 쓴 시’(A Poem by a Yellow Woman)를 듣자마자 자신이 진행하는 시 워크숍으로 유대표를 초대했다. 흑인, 여성,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시인, 교사, 암 생존자이자 두 아이의 어머니인 로드는 당시만 해도 뉴욕 캠퍼스에 드물었던 한국 여성이 쓴 시에 깊이 공감했다. “내가 처음 미국을 보았을 때 그것은 거대한 거인 같았고 나는 피그미 여자 같았지/ (황인종은) 피부색이 밝을수록 천국에 가깝고 어두울수록 지옥에 가깝다고 생각하지. 그래서 그들은 황색이 중간이라고 결정하고 백인에 미소 짓고 흑인에 찡그리지.”
인종, 성별, 성적 정체성 등 개인을 구별 짓는 ‘차이’야말로 사회를 움직이는 에너지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던 ‘영원한 아웃사이더’ 오드리 로드의 산문·연설문(1976~83년) 모음집 가 번역됐다. “주인의 도구로는 결코 주인의 집을 무너뜨릴 수 없다.” “백인 아버지들이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고 이야기한다면 흑인 어머니들은 이렇게 속삭인다. ‘나는 느낀다. 그러므로 자유롭다.’” “삶이란 성찰하는 것에 친숙해지는 것이다” “새로운 아이디어는 없다. 그것을 느끼는 새로운 방식이 있을 뿐이다.” “혁명은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다.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아주 작은 기회조차 놓치지 않기 위해 언제나 경계를 늦추지 않는 노력이다.” 이처럼 뜨거운 문장들이 곳곳에 새겨 있다.
그가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말하기와 쓰기, 즉 ‘침묵하지 않기’였다. 그는 흑인 사회에선 여성이 흑인 해방 투쟁의 주체임을 강조했고, 레즈비언 공동체에선 흑인의 정체성을 외쳤다. “당신의 침묵은 당신을 지켜주지 않는다” “우리의 손발을 묶고 있는 것은 차이가 아니라 침묵이다”라고 말했던 그에게 ‘시’는 생명줄과도 같았다. “시를 통해 우리는 감정을 (변화를 일으키는 데 꼭 필요한) 차이가 몸담을 수 있는 아지트로 만들 수 있다. (…) 시는 미래의 변화를 위한 토대이자 이전까지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을 건널 수 있도록 해주는 다리다.” 그는 글쓰기를 행동으로 확장해 가정폭력 생존자들을 돕는 ‘산타크루즈섬 여성연합’, 성적차별·인종차별로 고통받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여성들을 위한 ‘서로를 지지하는 자매들’ 조직에 힘쓰기도 했다.
1976년 유방암 수술을 받은 뒤 6년 만에 간암 진단을 받고 10년 뒤 58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오드리 로드는 죽음의 지뢰밭을 지나며 이렇게 썼다. “내 삶의 유한성에 대해, 그리고 이 삶에서 내가 원하고 바랐던 것들에 대해 근본적으로 의식할 수밖에 없게 되면서 (…) 이제껏 내가 가장 후회하는 부분이 바로 내가 침묵했던 순간들이었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미투 운동의 물결에 동참한 뒤 가늠할 수 없는 2차 피해를 겪는 여성들에게 제발 그의 말이 닿을 수 있기를. 간절한 바람을 담아 그의 문장에 밑줄을 긋는 수상한 시절이다.
이주현 문화부 기자 edigna@hani.co.kr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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