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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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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는 다층적 자서전”

책과 이별하는 순간의 단상 <서재를 떠나보내며>
등록 2018-07-31 17:28 수정 2020-05-03 04:28

을 쓴 작가이자 현재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장인 알베르토 망겔은 독서 능력을 철저히 신봉하는 인물이다. 서가에 꽂힌 어떤 책의 특정 페이지에 그가 고민하는 문제의 해답이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삶의 지식을 모으는 마음으로 책을 수집하다보니 소장한 책만 3만5천여 권이다. 그중 가장 아끼는 책은 개인적 추억이 어린 것들이다. 1930년대에 나온 음산한 고딕 서체로 인쇄된 그림 형제의 이라든가 같은 책에서 그는 삶에 필요한 유익한 힌트를 찾아낸다. 반짝반짝 빛나는 펭귄출판사의 최신 문고판들은 그 옆에서 느긋하게 꽂혀 있다.

프랑스 시골 마을의 널따란 석조 헛간에 서재를 마련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그의 삶에 책과 이별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프랑스 정부와 다툼이 생기면서 미국 맨해튼의 침실 한 칸짜리 아파트로 이사한 것이다. 망겔은 서재를 해체하고 70여 개 상자에 책들을 포장하면서 느낀 소회와 단상을 라는 에세이에 담았다. 발터 베냐민이 아내와 헤어지고 작은 집으로 이사해 상자에 담긴 책 2천 권을 하나씩 꺼내며 를 낸 것처럼 말이다. “책 풀기가 부활의 거친 행동이라면, 책 싸기는 최후의 심판 전 온순한 입관 절차와 같다. 책 풀기가 소란스럽고 무질서하게 부활한 책더미를 개인적 미덕과 변덕스러운 악덕에 따라 서가에 위치시키는 것이라면, 책 싸기는 이름 없는 공동묘지에 책들을 집어넣어 그들의 주소를 서가라는 2차원에서 상자라는 3차원으로 바꿔주는 것이다.”

망겔은 가져갈 책과 버려야 할 책, 창고에 보관할 책을 분류해 포장하면서 자신에게 서재가 어떤 의미인지 곱씹는다. 순간순간 책은 기억의 촉매가 된다. “나의 서재는 일종의 다층적 자서전이고 모든 책은 내가 그걸 처음 읽었던 순간을 간직하고 있다. 여백에 휘갈겨 쓴 메모, 면지에 가끔씩 적어넣는 구입 일자, 그리고 지금은 무슨 이유로 그랬는지 잊어버렸지만 읽다 만 페이지를 표시하기 위해 넣어둔 색 바랜 버스표, 이 모든 것은 내가 그 당시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내게 상기시키려고 애쓴다.” 자신의 인생 모두를 상자에 담았으니 텅 빈 서재에 섰을 때의 마음은 또 어떤가. “책 싸기는 망각을 연습하는 것이다. 영화 필름을 거꾸로 돌려 보는 것과 같다. 나는 텅 빈 서재 한가운데 서서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그 부재의 무게를 느꼈다.”

서재를 잃고 상처받았지만 그 상처를 치유해준 것 또한 책이었다. 서재를 뒤로하고 떠나던 날, 낯선 장기판 왕국에 떨어져 비참함을 느끼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게 백색 여왕이 한 말이 그를 위로해준다. “네가 얼마나 대단한 소녀인지 생각해보아라. 네가 오늘 얼마나 먼 길을 왔는지 생각해보아라. 지금 몇 시인지 생각해보아라. 아무것이라도 좋으니 생각해보아라. 그리고 울지 마라.”

망겔은 그와 함께했던 책들의 내용을 차례로 떠올리며 위로를 얻고 서서히 상실을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상자에 갇힌 책을 해방시켜 완벽한 서재를 이룩하는 일을 또다시 고민한다. “나의 끝은 나의 시작이다.” 메리 여왕이 처형을 앞두고 감옥에 갇힌 채 자신의 옷감에 수놓았던 문장이다.

김미영 문화부 기자 insty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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