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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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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친정, 언니

온몸에 붉고 푸른 멍자국과 함께 전우애 쌓은 언니…

지금도 우리는 알 수 없는 삶을 지나가는 중
등록 2018-01-09 17:43 수정 2020-05-03 04:28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맨 처음 비행기를 탄 것은 고등학생 시절이었다. 아버지를 따라 남도 여행을 갔을 때다. 언니도 함께였다. 셋이 함께 사진을 찍으려고 지나가는 관광객에게 부탁했다가 질문을 들었다.

“세 분은 어떤 사이세요? 선생님과 제자들이신가.”

언니와 나는 어릴 적부터 딴판으로 생긴 외모 때문에 함께 다닐 때마다 자주 이런 질문을 받았다. 항상 붙어다니다시피 했기에 익숙한 물음이었다. 아버지를 중간에 두고 보면 각각 조금씩은 닮았지만, 가족임을 알아차리기에는 느슨한 닮음이었다. 어머니와도 그랬고 나보다 세 살 어린 남동생도 마찬가지였다.

각별했던 언니

기억이 닿을 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던 부모님과 달리, 두 살 차이의 언니와 나는 사이가 각별했다. 스물에 언니를 낳고 스물둘에 나를 낳은 어머니는 언니가 놀러 나갈 때마다 나를 꼭 붙여 보냈다. 나의 어릴 적 기억은 놀이터든 친구집이든 대부분 언니를 또 다른 주인공처럼 간직하고 있다. 동네 목욕탕의 언니는 나를 새빨간 때수건으로 박박 밀어서 온통 불그스름하게 물들였다. 나도 보답하듯 언니 등을 있는 힘껏 밀었다. 둘이 사이좋게 울긋불긋 돌아가야 어머니가 만족해했다. 목욕탕에 그려진‘30분 건강 목욕법’에 따라 허둥지둥 목욕하고 뿌듯하게 돌아오던 날, 어머니는 화를 내셨고 우리는 실망했다.

언니 손을 잡고 동네 놀이터부터 옆 동네 놀이터를 순방하고 다니는 건 일상이었다. 돈이 생기면 버스 타고 도서관을 찾아가고 모험이 필요한 날에는 백화점도 다녀왔다. 에스컬레이터에 쭈그려 앉아 올라갔다 내려오는 기분이 놀이기구 타는 것처럼 신기하고 재밌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언니는 학교 앞 떡볶이집이 맛있다며 나를 이끌고 한 가닥에 10원 하는 떡볶이를 사주기도 했다. 내가 맨 처음 경험한 길거리 떡볶이였다. 8살 언니는 6살 동생이 매울까봐 양념만 빨아서 말개진 떡을 입에 넣어주었다. 나도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아, 맵다고 칭얼대며 언니 침이 발린 떡을 꿀떡꿀떡 씹어 삼켰다.

언니는 무엇이든 척척 만들었다. 윗집 언니에게 뜨개질을 배워 만든 복주머니는 주머니보다 양말 모양에 가까웠다. 나는 주머니를 발에 신고 방마다 뛰어다니며 소리쳤다.

“주머니가 양말이 됐어! 마술이다!”

언니가 친구들과 놀러나갈 때도 나는 어머니의 명을 받아 따라나서야 했다. 아니, 이건 언니에게야말로 귀찮고 힘든 일이었을 테니, 내가 여기서 불만을 털어놓는 것은 아니다. 언니는 나를 데리고 다니는 일이 당연한 듯 어디든 나를 챙겼다. 나는 종종 언니와 친구들이 노는 와중에 화를 참지 못하고 언니 친구들에게 싸움을 걸었다. 언니 친구들이 언니의 착함을 당연하다는 듯 남용하는 게 화가 났다. 사실 언니를 가장 힘들게 했을 사람은 나였는데도 말이다.

부모님의 싸움이 잦아지고 난폭해질 때마다 언니와 나는 만일의 경우를 대비했다. 집을 나가라고 혹은 나가겠다고 윽박지르는 당신들의 반복되는 후렴구 속에서 그들 없이 우리끼리 살아남는 법을 익혀야 했다. 밥을 지을 줄 알아야 했고, 구멍 난 양말을 꿰맬 줄 알아야 했으며, 학교 준비물도 서로 도와가며 챙겨야 했다.

어머니가 갑자기 사라지면 언니는 당연한 듯 내 도시락을 챙겼다. 신기하게도 언니가 싼 도시락은 어머니가 싼 것보다 더 맛있고 반찬 국물도 새는 법이 없었다. 나는 언니가 싸준 도시락을 먹을 때마다 언니에게 충성을 다짐했다.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으면 결의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

“언니요.”

“무슨 언니?”

“우리 언니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이들에게, 나는 똑똑한 아이답게 언니가 다니는 학교와 학년과 반에 번호까지 불러가며 언니의 존재를 밝혔다. 언니를 존경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무엇이든 만들었고 누구보다 다정했다. 언니가 싸준 새지 않는 도시락의 비밀은 다정함 덕분이었다. 언니는 도시락 뚜껑을 꽉 닫지 않으면 틈 사이로 국물이 새고 만다는 걸 세심하게 알았다. 국물이 번지면 냄새가 난다는 것도, 그 냄새로 얼마나 사람이 곤란해질 수 있는지도 헤아렸다. 언니는 자신에게 싫은 일이 내게도 싫으리란 걸 누구보다 잘 알아서 조심하는 사람이었다.

‘언니 보내기’

사춘기가 되어 한창 신경이 예민해졌을 무렵, 나는 평소엔 수업 필기도 안 하다가 시험 기간만 되면 뒤집어졌다. 내 호들갑을 잘 아는 언니는 그때마다 나를 얼러서 교과서를 보게 했다.

언니는 가는 곳마다 사랑과 존중을 듬뿍 받았다. 그런 언니를 일찌감치 알아본 나는 언니가 더욱 자랑스러웠다. 우리는 달랐고 그 다름을 서로 사랑했다. 다름을 통해 배우기도 했고(내 본래 목소리는 탁하고 낮았으나 언니를 따라 하다 그럭저럭 맑아졌다)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게 됐다. 우리의 다름은 기분 좋은 거니까, 유용하니까, 다름으로 존중받아 마땅했다. 다름으로 든든했고 함께해서 막강함을 느꼈다.

내 인생의 큰 위기는 언니가 대학에 들어가면서 찾아왔다. 언니의 귀가 시간이 늦어지고 언니 입에서 남자들 이름이 삐져나오기 시작했다. 언니가 더 이상 예전처럼 내 곁에 있을 수 없다는 걸 받아들여야 했다. 울기도 하고 화도 냈다. 언니는 버겁게 ‘언니 보내기’를 치르는 나를 멀고도 가까이서 지켜봐줬다. 내가 절박한 순간이면 꼭 붙잡아줬다. 나 또한 대학에 들어가자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됐다. 나는 언니보다 더 자주 남자 이름을 뱉어냈고 더 늦게 귀가했다. 입학도 하기 전에 아버지와 싸운 뒤 가출을 감행했다. 일주일 내내 친구 집을 전전하던 나를 찾아온 언니는, 내가 살 하숙집을 봐준다며 학교 앞을 함께 다니다 말을 꺼냈다.

“지금은 아직 집 나갈 때가 아닌 것 같아. 우선은 들어가고 좀더 준비해서 나오자.”

언니 말이면 고분고분 잘 따랐던 나는, 그날 저녁 집에 돌아갔다. 1년을 더 살았고 이듬해 사법시험을 준비하겠다는 거짓말을 대고 학교 앞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다음해 언니도 나와서 나와 함께 지냈다. 열혈 운동권이던 언니는 대학 졸업하고 1년 뒤 대학원에 들어갔고, 나는 그 덕에 법전 한번 들춰보지 않는 고시생 역을 유지할 수 없었다.

대학 4학년 때 아버지와의 불화가 깊어지자 유학을 제안해 내 삶에 출구를 만들어준 것도 언니였다. 그러나 결국 나는, 유학을 목표로 번 1천만원 넘는 돈을 사업이 어려운 어머니께 드리고야 말았다. 졸업 뒤 일상을 허랑하게 보내던 나를, 언니는 일요일 오후 서울 신촌의 패밀리레스토랑으로 불러냈다. 화창한 봄날, 북적이는 사람들 틈에서 언니는 떡볶이 대신 당시 유행하던 미국식 멕시코 음식을 먹였다. 식당을 나오는 길, 언니는 은행에서 카드빚으로 뽑은 100만원을 쥐여주며 말했다.

“서희야, 여기 더 있다가는 네가 망가질 것 같아. 그냥 떠나. 내가 도와줄게.”

파리행 비행기에 오르다

그로부터 석 달 뒤, 나는 언니의 배웅을 받으며 프랑스 파리행 비행기에 올랐다. 1996년 여름이었다.

돌이켜보면 언니와 나를 묶어낸 건 전우애이기도 했다. 우리는 아주 어릴 적부터 심각한 가정폭력을 함께 겪어냈다. 온몸에 붉고 푸른 멍자국을 꽃처럼 피우기를 취학 전부터 대학 졸업 때까지 거듭했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아버지의 폭력에도 우리는 착한 딸 노릇을 그만두지 못했다. 사업에 거듭 실패한 어머니는 생존을 위해 돈을 필요로 했고, 재기 자금을 요구했다. 우리의 10대는 착한 딸이자 학생으로, 20대와 30대는 부모님 삶의 자금원이자 보호자로 살아갔다. 몇 년 전까지 내가 모시던 아버지는 이제 언니와 함께 지낸다. 어머니는 몇 차례에 걸쳐 내가 혹은 언니가 모셨지만, 평화로운 동거는 이뤄지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어머니는 한국에, 언니는 미국 동부에, 나는 미국 서부에 살고 있다.

나이가 들고, 내가 언니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이 생겼다. 나는 거의 애원하다시피 언니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조금씩 하겠다고 말했다. 내가 주는 게 많아질수록 언니는 나를 보지 않겠다고 협박도 했지만, 이제는 내 행복을 위해서라도 예전보다 너그럽게 받아주는 편이다. 함께 있을 때면 나를 더 보살피고 같이 없더라도 매일 기도하며 나를 걱정한다. 지난해부터 연말이면 우리 집을 찾는 언니네 가족은 이번 크리스마스도 산타처럼 찾아왔다. 이제는 나도 언니에게 식당에서 밥을 먹이고 선물을 쥐여준다. 몇 안 되는 선물에도 어쩔 줄 몰라 하는 언니에게, LA의 한 상점가를 걸어가며 말했다.

“언니가 내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한지 알잖아. 언니 아니었으면 예전에 난 잘못됐을 거야. 그리고 언니, 난 친정이라고 느끼는 존재가 언니밖에 없어. 내 딸들을 제외하고 가족이라고 느끼는 사람이 언니밖에 없단 말이야. 언니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어. 그만큼 절박해.”

언니가 대답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그런데 가끔은 두려워. 내가 너에게 했던 일들이 결국 네 인생을 바꾼 것일 수도 있는데, 그게 과연 잘한 일이었을까 생각하게 돼.”

나도 모르게 언니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언니가 그때 나를 외국으로 급히 보내지 않았다면, 언니도 상상할 수 있다시피 나는 엄마아빠의 노예로 살았을 거야. 죽도록 일해서 부모님 기쁘게 해드리는 게 인생의 전부인 양 살았을 거야. 엄마아빠의 딸이 아닌 나로 살아가는 법을 익히지 못한 채 말이야.”

달라서 함께함에 감사하다

우리 자매는 결국, 엑소더스를 치르듯 한국을 떠나 미국에서 살고 있다. 누구도 상상하지 않았던 땅에, 영어를 모국어로 둔 아이 둘을 각각 두고서. 삶은 참으로 알 수 없어서, 어쩌면 운이 좋아서, 우리는 여기 다시 그 알 수 없음을 함께 지나간다.

함께 있는 동안 지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나눌수록 깨닫는 사실이 있다. 생긴 것도 다르고 성정도 기질도 살아가는 모습도 참 다른데, 달라서 우리는 사랑하고, 달라서 함께함에 더욱 감사한다. 언니는 몇 년 사이에 부쩍 늙었다. 어깨가 굽은 게 한눈에 보인다. 헤어지는 순간 꽉 껴안으려니 언니는 슬쩍 제 가슴을 뒤로 밀어낸다. 그 역시 언니답다. 나는 가슴을 불쑥 내밀어 언니의 밀린 가슴에 가닿는다. 그래도 안다. 언니의 가슴은 지난해보다 살짝, 내게로 전진했다. 우리는 달라서 배우는 사이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는 때부터. 아마도 그 전부터.

이서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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