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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광기에 희생된 혁명가

조선공산당 최고위급 지도자로 손꼽히던 김단야

스탈린 대숙청기 ‘일본 밀정’ 혐의 앞세워 총살돼
등록 2018-01-06 15:22 수정 2020-05-02 19:28
32살 김단야(1932년 소련 모스크바 추정). 임경석 제공

32살 김단야(1932년 소련 모스크바 추정). 임경석 제공

해방이 되자 혁명가들이 되돌아왔다. 국외로 망명한 항일운동가들이 속속 귀환했다. 중국 충칭에서 임시정부 요인들이 돌아왔고, 옌안에서 독립동맹 인사들이 귀국했다. 미국에서 살던 이승만도, 만주에서 활동하던 동북항일연군 조선인 간부들도 입국했다. 국외뿐이랴. 국내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던 비합법 지하 운동자들도 얼굴을 드러냈다. 감옥에 갇힌 치안유지법 위반자들도 형무소 문을 열고 나왔다. 징병과 징용을 피해 깊은 산속에 은거하던 도망자들도 산에서 내려왔다.

“혁명 이끌 사회주의자 육성”
김단야가 한국학부장으로 근무하던 동방노력자공산대학 건물. 임경석 제공

김단야가 한국학부장으로 근무하던 동방노력자공산대학 건물. 임경석 제공

돌아오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망명지에서 생을 마친 사람들이 그러했다. 하지만 죽었다는 풍문도 들리지 않았는데 되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모스크바에 망명한 혁명가들이었다. 소련은 국제관계상 오랫동안 일본과 적대적 위치에 있었고, 세계혁명을 이끄는 코민테른이 소재한 곳이었다. 그뿐인가. 수십만 고려사람의 이주민 사회가 형성된 땅이었다. 식민지 시대 한국의 사회주의자들이 모스크바로 이끌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많은 혁명가들이 소련으로 망명했다.

모스크바에 망명한 그 많은 혁명가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사람들은 궁금해했다. 이역만리에서 행여 병이라도 얻어 세상을 떴기 때문일까? 아니야, 그곳에서 자리를 잡아 잘 살고 있기 때문이겠지. 이렇게들 짐작했다.

김단야(金丹冶)가 그 좋은 보기가 된다. 박헌영과 더불어 조선공산당의 최고위급 지도자로 손꼽히던 그였다. 해방 이듬해 아들 김단야의 소식을 찾아 서울에 올라온 김종원(70) 노인의 동향이 신문에 보도됐다. 소련에 망명한 아들이 해방되고 나서도 귀국하지 않으므로, 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상경했던 것이다. “아들 생각이 나서 서울에 와보니, 자세한 것은 모르고 모스크바에서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풍문만 들었습니다.” 늙은 아버지는 기자에게 이렇게 답했다.① 아들의 소식을 끝내 확인할 수 없었던 노인은 하릴없이 고향 경북 김천으로 낙향해야 했다.

김단야가 위기감을 느낀 것은 아마 1936년 8월부터였을 것이다. 그때 그는 직장을 잃었다. 실직이기보다 책임 있는 직무에서 배제됐다는 의미에서 숙청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듯하다. 그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의 한국학부장 직위에서 면직됐다. 1934년 2월 이래 2년6개월 동안 한국학부장으로 있으면서 한국혁명을 이끌 사회주의자를 육성해오던 차였다. 김단야는 이 직무를 중히 여겼다. 학부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전력을 다하여 간부 양성을 위해 일했노라”고 자부했다.②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은 한국 사회주의운동과 깊은 인연이 있는 기관이었다. 그것은 1921년 4월 식민지 민족들의 해방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코민테른이 설립한 고등교육기관이었다. 설립 초창기부터 한국인 사회주의자들이 이 대학과 관계를 맺었다. 최근 한 연구 성과에 따르면, 1924~25년 이 대학의 한국학부에 재학 중인 사람은 무려 120명이나 됐다.③ 이 대학은 식민지 한국의 사회주의 청년들이 몹시 선망하던 교육기관이었다. 통칭 ‘모스크바공산대학’이라 하던 학교였다. 교육 연한은 2년제였다. 러시아어 학습을 위한 예비학부 재학 기간 1년을 포함하면 좀더 오랫동안 학적을 유지할 수 있었다.

김단야가 학부장이던 1930년대 중반에는 학부 규모가 줄어들었다. 예컨대 1933학년도에는 한국학부 내에 3개 학급이 있었는데, 총 학생 수는 15명이었다.④ 한창 성황을 보이던 1920년대 전반기에 비하면 16%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혁명에 대한 코민테른의 관심과 지원이 예전만 같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대숙청기, 밀정으로 의심 받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아직 괜찮았다. 상황이 점점 나빠졌다. 한국혁명의 중요성에 대한 고려가 코민테른에 과연 있는지 의심케 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의 한국학부가 철폐된 것이다. 김단야가 학부장직에서 물러난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1936년 8월에 한국학부가 폐지됨에 따라 나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떠났다”라고, 김단야는 자술서에 썼다.

코민테른 당국은 왜 한국학부를 폐지했을까? 해당 시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스탈린 대숙청이 바야흐로 막을 올리던 때였다. 숙청은 소련의 당과 군대와 정부기관의 책임 있는 지위에 있는 인사들을 겨냥했다. 이 시기에 숙청이란 말은 결함 있는 자의 면직과 새 인물의 등용을 뜻하는 통상적 의미로 쓰이지 않았다. ‘인민의 적’으로 지목된 혐의자가 체포, 고문, 자백, 재판, 처형을 차례로 겪는 참혹하고 유혈적인 사건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숙청의 절정기인 1937~38년 두 해 동안 내무인민위원부 비밀경찰에 체포된 사람은 경찰 기록에 의하면 158만 명에 이르렀다. 그중 유죄판결을 받은 자는 134만 명, 사형당해 목숨을 잃은 이는 68만2천 명이었다.⑤ 일단 체포되면 절반 가까이 사형을 당하는 실정이었다. 무서운 공포의 시절이었다.

숙청의 칼날은 러시아 국민만이 아니라 러시아에 체재하는 코민테른과 외국 공산당 요인들에게도 향했다. 벨러 쿤을 비롯한 헝가리 공산당원, 렌스키 서기장을 필두로 하는 폴란드 공산당 지도자들,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불가리아 공산당, 독일 공산당, 이탈리아 공산당, 그 외 외국 공산당의 지도부와 일반 당원들이 희생됐다. 독일의 예를 들어보자. 1938년 4월 현재 소련에 거주하는 독일 공산당원 842명이 내무인민위원부 비밀경찰에 체포됐다. 이 수는 실제보다 과소 집계된 것으로 평가된다.

소련에 체류 중인 한국인 사회주의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너나 할 것 없이 스탈린 대숙청에 휘말려들지 모르는 위기감 속에 지내야 했다. 1936년 8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한국학부가 폐지된 것은 이런 정황을 반영한 사건이었다. 한국인 혁명가들이 예외 없이 ‘인민의 적’일지 모른다는 의심과 경계의 눈초리에 노출됐음을 뜻했다.

김단야는 해직 뒤 이중의 고통을 겪었다. 첫째, 일본 밀정이라는 혐의를 받았다. 동료들에게서 사적으로 그런 의심을 받더라도 보통 일이 아닐진대, 생사여탈권을 쥔 소련 국가기관으로부터 혐의를 받았으니 여간 위태로운 게 아니었다. 객관적 물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의심스러워 보였을 뿐이다. 1929년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을 위해 국내에 잠입해 활동할 때 다른 동지들은 모두 체포됐는데, 어찌하여 너는 무사히 국외로 탈출할 수 있었는가? 가까운 네 동료 김한이 이미 밀정임이 판명돼 1934년에 처형됐는데, 너는 과연 그의 정체를 몰랐는가? 김단야는 이러한 의심을 받았다.

자기를 변호하는 필사적인 노력
김단야의 한글 필적(해명서 첫 장, 1937년). 임경석 제공

김단야의 한글 필적(해명서 첫 장, 1937년). 임경석 제공

또 하나는 일상생활의 곤궁함이었다. 그는 모스크바 시내에 있는 노보페레베덴스카야 거리 8번지에서 가족과 함께 거주했다. 아내 주세죽과 어린 두 아이가 있었다. ‘비딸리’라는 이름의 3살 아들과 이제 갓 낳은 딸이었다. 이들이 거주하는 주택의 소유권은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있었다. 교직원에게 배분되는 관사였던 것이다. 어쩌랴. 김단야는 해직돼 그 주택도 비워줘야 했다. 해직 뒤 7개월 동안 두 차례나 가옥 양도 명령서가 날아왔다. 대학 행정 당국이 보낸 공문이었다. 더 이상 양도를 지체하면 재판에 회부하겠다는 냉정한 내용이 담겼다. 오갈 데도 없이 길거리에 나앉게 생겼다.

그뿐이랴. 여권 문제도 있었다. 아내의 여권 기한이 만료돼 갱신을 신청했다. 하지만 웬일인지 갱신 허가가 떨어지지 않았다. 여권 발급 여부를 내무인민위원부가 심의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주소지 행정 기관도 인정사정없이 채근했다. 거주 기한을 넘겼다는 이유로 벌금을 내야 한다는 통보를 보내왔다.

많은 문제가 뒤엉켜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게 하나의 문제로 귀결됐다. 김단야는 만사가 “나 자신에 대한 근본 문제의 해결”에 달렸다고 이해했다. “내가 믿을 만한 혁명자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였다. 그는 자신이 안고 있는 혐의로부터 속히 벗어나야 했다.⑥

김단야는 자기를 변호하는 필사적인 노력에 착수했다. 자신의 결백함을 뒷받침하는 근거와 논리를 제공하기 위해 장문의 글쓰기 작업에 임했다. 1937년 2∼3월 여러 편의 글을 썼다. 혁명운동 경력을 소개하는 ‘이력서’, 밀정 혐의가 근거 없음을 보여주는 상세한 ‘해명서’, 심문자가 제기한 자잘한 의문들에 대한 답변을 적은 글이었다.

그가 힘을 기울인 논점은 밀정 혐의에 대한 항변이었다. 1929년 7월부터 12월까지 국내에 잠입해 어떻게 비밀 활동을 했는지 상세히 묘사했다. 이때 김단야는 “흥분 중에 글을 썼다”고 한다. 아마 다음 대목일 것이다. 그는 조선의 경험 많은 공산주의자 가운데 1925년 이래 한 번도 체포를 당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남들이 다 잡혀가는 상하이에서도 무사했고, 한국 내에 잠입해서도 임무를 마친 뒤 무사히 벗어나기를 두 차례나 거듭했노라고 말했다. 그는 이 대목에서 분노를 터트렸다. 이게 과연 허물이냐고 말이다. 붙잡히지 않으려고 기민하게 행동하는 것이 의심받아야 하는 근거가 되느냐고 항변했다.

밀정 김한이 왜 자신을 경찰에게 밀고하지 않았는가? 심문관들이 집요하게 되묻는 질문이었다. 김단야는 답했다. 김한을 의심하지 않았노라고. 김한은 다년간 투옥 경력이 있는데다 한국 사회주의운동의 개척자였으므로, “일반이 혁명자로 인증하는 자요, 나도 그를 믿었다”고 말했다. 김한이 밀정임을 인정하더라도, 그의 행동 동기를 자신은 알 수 없다고 썼다. 그것은 김한 자신이나 일본 경찰이 알 일이지, 내가 추측으로 알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항변했다. 그는 모른다고 답했다.

숨 가쁜, 그러나 실패한 구명운동

김단야는 요청했다. 자신을 혁명 일선으로 파견해달라고. 조선에 가서 조선공산당 재건 사업과 혁명운동에 종사하는 것이 자신의 바람이라고 말했다. 그는 “실지 전선에 가서 일하는 것이 나의 사명”이라고 표현했다. 혁명가의 진실성을 입증할 유일한 길이므로 부디 허용해달라고 청했다.

위기에 처한 김단야를 도우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한국과 동아시아의 혁명을 관장하는 코민테른 동방부의 임직원들이 나섰다. 그의 오랜 동료들이었다. 김단야가 1937년 2~3월 장문의 이력서와 해명서 등을 집필한 것도 사실은 이 동료들의 제안에 따른 행동이었다.

동방부 임원 벨로프가 1937년 3월2일 구명의 손길을 뻗었다. 김단야가 ‘인민의 적’ 혐의를 받고서 취조를 받는 중이었다. 내무인민위원부 간부 폴랴체크에게 공문 제11013호를 보냈다. 조선공산당의 당면 사업을 위해 김단야를 현지 파견 대표로 선임했으니 그 집행 여부를 회신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 갇힌 김단야에게는 한 줄기 빛과 같았다.

그해 5월4일에도 구명의 움직임이 있었다. 코민테른 동방부의 또 다른 임원인 밀러와 최성우 두 사람이 연명으로 같은 요구를 했다. 이번에는 코민테른 간부국 알리하노프에게 보내는 공문이었다. 김단야를 조선공산당 방면의 실제 사업에 활용하려는데, 그의 정치적 경력에서 한 부분이 아직 해명되지 않았으므로 이 문제의 결론을 되도록 속히 보내달라는 요청이었다.

6월7일에도 또 한 번 움직임이 있었다. 동방부 임원 벨로프가 다시 내무인민위원부 폴랴체크에게 회신을 독촉했다. 3월2일치 공문의 회신을 속히 부탁한다는 내용의 공문을 발송했다. 동방부 임원들의 거듭된 요청은 위기에 처한 김단야의 운명을 변화시킬 가능성이 있었다. 한국혁명이 중요하다면 혁명운동을 진작할 만한 작은 가능성이라도 존중받지 않을까? 과연 운명의 추는 어디로 움직일 것인가?

마침내 8월2일 내무인민위원부가 회신을 보내왔다. 김단야를 조선에 파견하는 것은 권고할 만한 일이 아니라는 내용이었다. 운명의 여신은 김단야에게 등을 돌렸다. 1937년 상반기 코민테른 동방부에 남아 있던 옛 동료들이 시도한 숨 가쁜 구명운동은 8월에 가서 결판이 났다.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벼랑 끝에 선 김단야의 등을 떠미는 동료도 있었다. 언론인 출신의 저명한 사회주의자이자 모스크바 망명객인 이성태는 그해 9월28일치로 코민테른 비서부 앞으로 의견서를 냈다. 의견서에 따르면, 김단야는 화요파 위주의 종파주의자이고 가까운 동료들 중에는 밀정으로 전락한 자가 많았다. 김찬, 조봉암, 박헌영, 김한, 고명자 등이 지목됐다. 이 의견서에는 김단야는 검거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체포되지 않은 극소수에 속했고, 두세 차례 체포됐을 때도 다른 동료들보다 현저히 낮은 형량을 받고 풀려났다고 쓰여 있었다.⑦

선고한 날 바로 총살형 집행

김단야는 1937년 11월5일 내무인민위원부 경찰의 손에 체포됐다. ‘반혁명 스파이, 테러단체 결성’ 혐의였다. 스탈린 대숙청의 다른 피해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고문, 자백, 재판, 처형의 길을 걸었다. 체포 3개월 만에 이 모든 과정이 종료됐다. 1938년 2월13일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법정은 러시아 형법 제58조 1항, 동 2항, 8항, 9항, 11항 위반죄로 김단야에게 재산 몰수와 총살형을 선고했다. 형 집행은 신속히 이뤄졌다. 선고한 바로 그날 총살형이 집행됐다. 매장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⑧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① ‘아들 소식 들으러 서울까지?’, 1946년 5월2일
② Ким Даня(김단야), автобиография(자서전), с.10,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39 л.56-65, 1937년 2월7일
③ 김국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조선학부 연구’, 성균관대 사학과 석사학위 논문, 11쪽, 2013년
④ отчетный доклад 5-й секции(한국학부 보고서), с.1-3, РГАСПИ ф.532 оп.1 д.427
⑤ 김남섭, ‘스딸린 대 테러의 성격’, 15-2, 49쪽, 2005년
⑥ 김단야, ‘나의 제출한 записка에 대한 보충 건’,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39 л.37-39, 1937년 3월16일
⑦ Бывш.члена КП Кореи Ким-Чун-Сен /Лп-Сен-Тай/ (전 조선공산당원 김춘성 곧 이성태), Заявление: В Секретную Часть ИККИ (의견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비서부 앞),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39 л.9-12, 1937년 9월28일
⑧ Ким Данъ Я(김단야), https://ru.wikipedia.org/w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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