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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없으면 인공지능도 없다

인간 심리와 AI는 비대칭적 관계… 상호의존성 통해 공존 가능
등록 2025-03-14 22:14 수정 2025-03-20 12:19
영화 ‘오토마타’의 한 장면.

영화 ‘오토마타’의 한 장면.


결국 인공지능(AI)은 인간의 지능을 모방한다는 점에서 그 정의는 명확하다. 근대 철학의 창시자라는 데카르트만 해도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은 지능을 갖지 않은 로봇이라고 생각했다. 앞서 거론한 칸트의 경우를 보더라도 이렇게 지능을 인간 고유의 능력이라고 믿는 경향은 이른바 ‘대륙 철학’에서 일반적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이와 대조적으로 영국의 사상가들은 동물도 인간과 유사한 지능을 지녔다고 생각했다. 영국의 자유방임주의에 깊은 영향을 미친 버나드 맨더빌 같은 경우를 보면, 처음에는 데카르트의 생각에 따라서 동물의 지능을 부정했지만, ‘꿀벌의 우화’를 집필할 당시에는 다른 동물도 인간처럼 지능을 가졌다고 견해를 바꿨다.

 

지능 가진 기계-자유의지 없는 인간

인공지능을 둘러싼 논의에서 이런 초기 근대의 논리가 되풀이되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도 흥미롭다. 앨런 튜링을 비롯해서 초지능을 주장하는 이들이 궁극적으로 주장하려는 것은 맨더빌처럼 동물의 수준을 넘어 기계도 지능을 가질 수 있다고 믿는 입장이라 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이런 논리를 뒷받침하는 이론은 행위에 초점을 맞추는 경험주의다. 튜링처럼 문제 해결 능력을 지성으로 볼 경우, 주어진 문제를 일정하게 해결할 수 있다면 기계도 지능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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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입장과 짝을 이룬다. 튜링이 컴퓨터 지능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기 바로 전인 1948년 미국의 행동심리학자인 비에프(B. F.) 스키너는 과학소설 한 편을 선보인다. 이 작품이 유명한 ‘월든 투’다. 이 소설은 전통적인 정치나 경제 시스템이 아니라, 행동공학 원리에 기반한 유토피아 공동체를 제시한다. 줄거리는 이렇다.

심리학 교수인 버리스가 친구들과 함께 실험적 공동체인 ‘월든 투’를 방문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공동체의 공동 설립자인 프레이저가 그들을 안내하며 공동체의 구조와 철학을 설명한다. 이 공동체는 처벌이나 강제가 아니라 긍정적 강화(Positive Reinforcement)를 통해 사람들의 행동을 형성함으로써 행복, 협력, 효율성을 극대화하고자 한다. 월든 투에서는 정부, 종교, 전통적인 가족 구조와 같은 기존 제도를 변화시키거나 대체한다. 사람들은 적은 시간 동안 일하고, 공동 책임을 분담하며, 위계질서 없이 살아간다. 공동체는 단순한 삶, 자기 절제, 평생 학습을 중요하게 여긴다. 소설은 이런 가치에 매료된 일부 방문객이 공동체에 남기로 하면서 끝이 난다.

이 소설의 플롯은 주인공 프레이저가 공동체의 존립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철학자 캐슬을 비롯한 방문객들의 비판에 대응해 월든 투의 가치를 옹호하는 방식으로 흘러간다. 일반적인 소설의 전개 방식이라기보다 철학적 논쟁이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는데, 이런 이야기를 통해 스키너가 말하고자 한 것은 인간이 환경의 산물이라는 사실이다. 이때 인간이 환경의 산물이라는 것은 조건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행위가 인간의 특징을 결정한다는 뜻이다. 이런 주장을 증명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다. 경제가 나빠지면 실업률이 증가하고 삶이 곤궁해져 개인은 불행해진다.

물론 스키너는 행동심리학자이기 때문에 거창한 철학적 논리를 동원하진 않는다. 오히려 스키너의 소설은 이런 행위의 과정을 인간 심리와 환경의 관계로 이해하게 한다. 말하자면, 인간 심리는 환경의 자극을 통해 형성된다는 소박한 생각이 소설 내용에 반영된 것이다. 이 문제의식은 인공지능에 대한 논의로 넘어오면 입력과 산출이라는 공식으로 바뀐다. 이런 메커니즘에서 인간 심리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입력된 내용이 산출로 이어지는 그 과정 자체다. 이 과정을 스키너와 튜링은 ‘블랙박스’라고 생각했다. 노버트 위너의 사이버네틱스 개념도 사실상 이런 ‘블랙박스’를 구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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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행동심리학자인 B. F. 스키너의 과학소설 ‘월든 투’.

미국의 행동심리학자인 B. F. 스키너의 과학소설 ‘월든 투’.


인간 심리, 외부 자극과 무관한 작용

이 과정이 ‘블랙박스’로 이름 붙여진 까닭은 자극이 가해지면 거기에 대한 반응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만 그 반응이 어떤 방식으로 일어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 심리와 인공지능 메커니즘의 과정을 동일하게 ‘블랙박스’로 봤기에 이런 발상이 가능하다고 하겠다. ‘월든 투’가 그린 유토피아는 그 공동체의 개인 하나하나를 ‘블랙박스’로 대하는 세상이다. 말하자면, 입력에 정확하게 대응하는 산출이 이루어지는 세상이 스키너가 상상했던 유토피아였던 셈이다.

튜링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이 컴퓨터와 동일하게 작동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상태였다. 이 상태는 입력에 따라 산출이 이뤄지고, 그 산출을 스스로 검토할 수 있어야 한다. 이처럼 인공지능의 신화는 분명 대륙 철학이 인간 심리에 대해 고민했던 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단순한 논리에 기반하고 있다. 최소한 칸트만 하더라도 인간을 ‘생각을 가진 오토마타(태엽이나 기타 동력이 달린 기계장치)’라는 점에서 다른 동물과 구분했지만, 인공지능 이론가들은 이 생각조차도 자동화의 산물로 봤다.

하지만 스키너의 행동주의 이론은 20세기 후반에 오면서 여러 반례를 통해 오류로 판명 났다. 이른바 ‘인지 혁명’은 지능이 외부 자극과 무관하게 오직 내부적 차원에서 이뤄진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오늘날 인공지능 이론이 근거한 전제는 스키너의 것이라기보다 이렇게 새로운 발견에 있다. 이렇게 내부적 차원에서 이뤄지는 인간 심리의 메커니즘을 컴퓨터의 정보처리 방식과 같다고 보는 이론을 대다수 인공지능 이론가와 개발자들이 채택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실 자체가 역설을 내포한다는 점이다. 내부에서 일어나는 심리의 메커니즘 자체가 외부와 무관하다면, 더더욱 그 원리를 알 방법이 없고, 그 원리를 모방해서 동일하게 작동하는 기계를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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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마음과 컴퓨터를 동일시하는 이런 관점은 전혀 과학적 근거가 없다. 다만 그 인지과학적 발견을 바탕으로 그럴 것이라고 ‘추론’할 뿐이다. 섣불리 인공지능에 맞서 인간의 창의성을 강조하면서 기계가 인간을 능가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도 문제지만, 반대로 인간의 마음을 너무나 쉽게 컴퓨터의 작동과 같은 것으로 취급하는 주장도 문제다. 얼핏 들으면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둘 모두 명확한 근거를 가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모두 예언을 즐긴다는 점에서 인문학자나 과학자나 사실 크게 다르지 않다.

 

전문가들조차 엇갈리는 ‘예언’

어떻게 보면 인간은 서사의 동물이다. 최근 뇌인지 과학이 밝혀낸 사실을 보면, 인간의 기억은 뇌세포에 기승전결을 갖춰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마치 프로이트가 이야기한 꿈의 작용 방식처럼 비슷한 상황을 조우했을 때 순간 기억의 파편들이 자의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우리가 “기억력이 좋다”고 생각했던 이들은 사실 이 순간 기억의 파편들을 가지고 그럴듯하게 이야기를 잘 꾸며내는 능력이 탁월했던 것이다. 우리 뇌는 컴퓨터 디스크처럼 데이터를 저장하지 않는다. 이런 새로운 발견은 스키너나 튜링과 같은 이들이 전제했던 인간의 마음과 인공지능의 상관관계를 다르게 바라보게 한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인공지능 이론가들 사이에서도 인간과 같은 급수의 인공지능이 가능한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요슈아 벤지오처럼 인간과 같이 생각할 수 있는 인공지능이 언제 출현할지 아무도 모른다고 대답하는 과학자가 있는 반면, 레이 커즈와일처럼 2029년이면 일반인공지능이 출현할 것이라고 정확하게 ‘예언’하는 과학자도 있다. 물론 나는 개인적으로 벤지오가 과학자에 걸맞은, 더 사려 깊은 대답을 했다고 본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과학은 실험 결과와 일치하는 가설에 한해 참을 주장해야 한다. 그럼에도 과학소설 같은 상상이 ‘정상 과학’의 한계를 허물고 뛰어넘을 수 있는 열정을 제공하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벤지오의 의견을 지지하면서도 나는 커즈와일처럼 ‘매드 사이언티스트’ 같은 입장도 사기꾼이라고 매도할 것이 아니라 일정하게 존중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내가 보기에 이렇게 둘로 나뉜 과학계 내부의 의견은 인공지능 개발과 관련해 한쪽 측면만을 부각하는 입장 때문이다. 여하튼 첨예하게 보이는 두 입장이 공유한 토대는 인간의 마음과 컴퓨터를 동일시하는 관점이다. 나는 이런 전제 자체가 문제라는 생각이다. 인간의 마음과 컴퓨터를 대칭적인 관계로 파악하는 것은 둘 모두를 오리무중에 빠트린다. 인공지능 개발을 인간 심리의 작동 방식을 모방하는 기준에 맞췄을 때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인공지능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갈 수 없다. 설령 한계를 넘어가더라도 그 인공지능은 인간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쓸모없어질 뿐이다.

나는 인공지능과 인간 심리의 관계는 비대칭적이라는 1950년대 프랑스 철학의 통찰에서 이 문제를 이해할 제3의 관점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당시에 자크 라캉이나 질 들뢰즈를 비롯한 프랑스 철학자들은 오늘날 인공지능의 원조에 해당하는 사이버네틱스와 정보이론을 검토하면서 인간 심리가 매끄러운 커뮤니케이션의 결과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특히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인간 무의식을 열역학 공식에 맞춰 이해했던 프로이트의 관점에서 벗어나 인간의 욕망 구조를 사이버네틱스로 보는 입장을 도입함으로써 정신분석학이 인공지능에 개입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 위키미디어 코먼스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 위키미디어 코먼스


라캉, 정신분석학이 AI에 개입하는 길 열어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런 제3의 관점은 인간의 마음과 컴퓨터를 같은 것으로 보거나 인간과 인공지능을 대칭적 관계로 설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칭적 관계를 통해 작동하는 인공지능의 메커니즘이 비대칭적 관계를 이루는 ‘주체’를 생산한다고 봤다. 이런 비대칭성에 의해 인공지능은 필연적으로 바로 ‘나’를 필요로 한다. ‘그것’이 있던 자리에 ‘내’가 가야만 하는 것이다. 인공지능은 이 상호의존성에 내재한 이 비대칭성을 통해 우리와 함께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이 없는 세계는 인공지능에도 없는 세계일 뿐이다.

 

이택광 문화비평가·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영미문화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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