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지방 도시에서 단 한 번도 1등 자리를 놓쳐본 적 없던 그녀가 서울의 모 여고에 입학했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상경해 시집간 언니들의 집을 전전하며 학교를 다닌 결과치고 처음 치른 시험 성적은 처참했다. 밥값 축내며 쓸데없이 공부나 하고 있다는 구박에 이를 악물었다. 다음 시험에서 그녀는 전교 1등을 차지했다. 자축만으로는 부족했지만, 주변 어느 누구도 그녀의 성공을 기뻐해줄 것 같지 않았다.
그의 뒤를 쫓아 좁고 굴곡진 길로자연스럽게 그를 떠올렸다. 중학교 때 열렬히 좋아했던 선생님. 영특하고 거침없던 그녀는 14살 위 총각 선생님의 관심을 독차지했다. 끼니를 제때 잘 먹지 못하는 그가 먹을 음식을 챙기기 위해 생전 들락거리지 않던 부엌을 출입하기 시작했다. 그의 자취방에 그녀가 들고 가는 것들의 목록은 급속도로 범위를 넓혀갔다. 식기는 물론이고 생활용품, 돈이 될 만한 귀중품까지 들고 갈 만큼 그녀는 과감해졌다. 홀로 사는 노총각의 자취방을 드나드는 마을 지주의 막내딸 이야기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추문이 수치스러워 양잿물을 들이켰다가 발각됐고 선생님은 학교를 그만두고 마을을 도망치듯 떠났다.
그녀는 어느새 그가 근무한다는 고등학교에 전화를 걸고 있었다. 서울에서 얼마 전부터 살고 있으며, 그의 학교에서 멀지 않은 여고에 다닌다는 소식을 알렸다. 물론 그곳에서도 1등은 그녀 차지가 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그는 축하받을 일이라며 바로 만날 것을 제안했다. 서른을 훌쩍 넘긴 사내는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월급 대부분을 고향집에 보내고 산동네 판잣집에서 자취하고 있었다. 결혼은 포기했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녔지만, 사무치는 외로움에 뜬눈으로 밤새우는 날이 늘어갔다. 눈앞에 선 그녀는 1년 사이에 처녀티가 났다. 발갛게 달뜬 얼굴로 자신을 찾아와 시험지를 내미는 제자의 부쩍 자란 모습에 마음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흔들렸다. 학교 근처 빵집에서 만난 그녀에게 집에 와서 빨래를 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녀는 서울 한복판에서 만난 그리운 얼굴이 가슴 가득 벅찼지만, 그것도 잠시. 시골 마을에서는 그토록 빛나 보이던 남자의 추레한 모습은 그녀의 맨 처음 시험지처럼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반가움은 혼란마저 뒤흔들어 연민으로 뒤바꿨다. 차마 거절할 수 없어 그의 뒤를 쫓아 좁고 굴곡진 길을 밟았다. 그리고 손등이 빨개질 때까지 빨래를 했다.
“빨래만 하고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밥이나 같이 먹고 가자고 붙잡더라. 끼니도 제대로 못 챙겨 먹는가 싶어 이것저것 간단히 해 먹이려 했는데 그만 그때 처녀성을 잃고 만 거야. 이제 다 끝났다 싶어 엉엉 울어대니, 그 사람이 그러더라. 중학교 때 적성검사 결과를 자기가 봤는데 나는 공부는 적성에 안 맞는다고. 상업이 맞으니 장사를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여자는 말이야, 걷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어”학교로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처녀도 아닌 주제에 여고생 교복을 입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는 것이 남자의 조언이었다. 한 달을 그의 집에서 머물렀다. 매일 그의 밥상을 차렸고 집안일을 돌봤다. 하루가 쏜살같이 흘러갔다. 한나절이 빠르게 흐를수록 밤이 되면 허전함이 커져갔다. 처량한 신세를 한탄하며 눈물 흘릴 때마다 남자는 손수 물을 받아와서 여자의 발을 씻겨줬다. 남자는 가난했지만 다정했다. 그녀는 행복이란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도망가는 마음을 붙잡아 그를 더 사랑하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해봤지만, 사흘을 넘기지 못하고 답답해졌다. 바깥 구경도 못한 채 집에만 갇혀 살다시피 한 지 한 달이 넘어갔다. 마침내 그날 밤 떠날 것을 선언했다.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얼굴이 터지고 온몸에 피멍이 들 만큼 맞아봤다. 여자는 이제 무서워서 떠날 수 없었고 몇 주 뒤엔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에 떠난다는 상상조차 접어버렸다.
여자는 첫아이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아 아이를 둘러업고 장사를 시작했다. 아이는 하나에서 둘이 됐고 어느새 셋이 되었다. 남편의 폭행은 나날이 심해졌지만 행복한 순간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새 집을 맨 처음 마련한 날, 한때 글쟁이를 꿈꿨던 남편에게서 감동적인 편지를 받고 눈물도 흘렸다. 남자의 다정함은 종잡을 수 없었지만, 예측할 수 없는 날씨처럼 떨리고 황홀해 차마 떨칠 수 없었다. 어릴 적부터 거칠고 유별나다 타박받던 그녀의 성정은 온순함과 순종을 배워가는 듯도 했다. 장사판에 나가면 활어처럼 파닥이듯 살아오르던 그녀도 그의 앞에 서면 도마 위 기절한 생선처럼 깜박 제 존재를 잃었다. 그때마다 그녀는 수도 없이 삶의 한순간을 재생하듯 되돌려봤다. 내가 만일 그때 처녀성을 잃지 않았더라면, 좀더 내 삶의 온전한 주체가 되어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혼몽한 낮꿈처럼, 빌지 못한 소원처럼, 잠시 왔다 속절없이 떠나가는 살지 못했던 또 다른 삶을 향한 염원은 그녀의 딸들을 향한 기이한 집착이 되었다.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처녀성에 관한. 일로 바쁜 나날 동안 며칠이고 무심하게 잊고 지내던 자식들이었지만, 때가 되면 흔들리는 물결처럼, 출렁, 딸들에게 일렀다. 절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처녀성은 잃지 말라고.
그녀의 둘째딸은 첫딸과 막내아들 사이의 삼각지대 속 깜박 잊힌 존재처럼 자라났다. 그럼에도 둘째딸의 처녀성만큼은 화창한 하늘 위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구름처럼 자리에 떠돌고 있었다. 뜬금없이 그녀는 딸에게, 한낮의 살랑이는 미풍처럼 무심하게 말을 흘렸다.
“처녀성을 잃으면 안 돼.”
딸은 처녀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른 채, 기이한 비밀지령을 받은 스파이처럼 꾸역꾸역 그녀의 부탁을 삼켰다. 내장을 꼬깃꼬깃 흘러가는 말은 소화되지 않은 채 뱃속을, 혈액 속을, 구석구석 부서져서 맴돌았다. 만 여덟 살이 될 무렵 당시 고등학생이던 친척 오빠의 협박으로 어두컴컴한 광에 갇혀 바지가 벗겨졌을 때도 처녀란 말의 정확한 의미보다는 불길한 어감에 몸을 떨었다. 방으로 되돌아와 깊은 물에 빠지듯 잠에 들었을 때도, 한낮에 땀을 뻘뻘 흘리며 깨어나 개울에 나가 몸을 씻었을 때도 정확한 기억은 사라지고 불길한 예감만 등골을 훑고 내려갔다. 중학생이 되어 처음 맞은 생물 시간에 초로의 남자 선생은 교실을 빼곡하게 메운 여학생들에게 말했다.
“여자는 말이야, 걷는 것만 봐도 처녀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그의 선언과도 같은 발언에 공포와 거부감이 동시에 왈칵 덮쳐왔다. 몇 주에 걸친 기억의 탐사가 이루어졌지만, 아무리 헤집어보아도 까맣게 지워진 기억의 크레바스는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검고 먹먹했다. 되돌아 빠지는 대신 선택하기로 했다. 적어도 거부할 수는 있지 않은가. 생물 선생의 선언에 맞서 새롭게 선언했다. “나는 처녀를 위하여 살지 않는다. 나는 처녀이든 아니든 상관없는 삶을 살겠다.”
인생 끝난 줄 알고 지레 포기한 엄마선언이 있다고 하여 천지개벽하듯 삶도 세상도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거부할 수 있는 가능성을 꿈꾸자 괴로움의 농도가 옅어졌다. 조금씩 삶의 지도가 움직였다. 쫓기는 삶에서 벗어났다. 당신이 요구하는 것이 내가 원하는 건 아니라고 말하는 순간, 내가 원하는 것을 들여다볼 힘이 솟아나기도 한다는 걸 그렇게 배웠다. 사랑과 관심이라는 미명 아래 행해지는 폭력이 도처에 얼마나 널려 있는지, 어쩌면 그녀들의 삶 자체가 폭력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과정이었음을 깨닫는 데는 더 오랜 시간이 흘러야 했다.
안에는 분열을 안았다고 해도 누가 보기에도 나무랄 데 없는 착한 여자로 자라나서 둘째딸은 대학생이 되었다. 그리고 대학 입학 뒤 사귄 남자친구와 얼떨결에 하룻밤을 보냈다. 놀랍게도 이불은 붉은 피로 물들었(다고 했)고 그 광경을 제 눈으로 보고 싶지 않았던 여자는 남자에게 당장 이불을 빨아올 것을 요구했다. 한바탕의 소동을 끝낸 뒤 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동이 틀 무렵이었다. 담을 넘어 현관문을 조심조심 열었을 때 딸의 눈앞에 보이는 건 문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엄마의 그림자였다. 그녀는 다짜고짜 딸의 등짝을 후려치며 말했다.
“너, 처녀 아니지? 도대체 너, 어쩌려고 이러니?”
갑작스러운 팩트 공격(세상에, 바로 그날이 오늘인 걸 어찌 알았을까)에 심장이 쪼그라든 둘째딸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갑자기 왜 그래?”
“오늘 내가 용하다는 무당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그러더라. 네가 처녀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딸은 들켰다는 공포보다 무당의 영험함에 감탄하고 말았다.
“와, 그 무당 누구야? 진짜 용하네. 같이 보러 가자, 엄마.”
엄마는 기가 막힌 듯 딸을 노려보다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옷장사로 시작해 사업가로 성공했다가 시원하게 집안 재산을 통째로 두어 번 말아먹고 다시 재기 중인 엄마는 대답했다.
“이왕 그렇게 된 거 연애나 실컷 하고 살아라. 엄마는 젊을 때 처녀성 잃었다고 인생 끝난 줄 알고 지레 포기하고 살았어.”
딸은 엄마의 반응이 어리둥절했으나 붙잡고 묻기에는 몰려오는 피로를 감당하기 힘들었다. 어쨌든 잊지 못할 날이었음은 분명했다.
이제 둘째딸은 마흔을 넘겨 그날 엄마의 나이마저 지나버렸다. 엄마와 아빠는 한동안 그럭저럭 평온한 삶의 균형을 이룬 듯이 보였으나 고난의 시절이 찾아오자 아빠의 폭력은 보란 듯이 귀환했고 예순 넘은 엄마는 비로소 이혼했다. 양쪽 모두 피해자로 남은 결혼생활이었다.
두려움에 맡기는 삶이란아빠도 엄마와의 결혼만 아니었다면 인생이 이토록 비참하지는 않았으리라고 되풀이해 말한다. 결혼은 때로 패잔병만 남기는 상처투성이 전쟁터와 같다. 딸들을 번듯한 집안에 결혼시키고서야 이혼한다던 엄마의 바람은 제멋대로 남자를 골라 통고하듯 결혼해버린 두 딸 덕에 허무해졌다. 우리는 때로 용기보다 두려움에 삶을 맡긴다. 그리고 깨닫는다. 두려움의 삶은 타인의 것도 제 것도 아닌 삶의 림보(limbo)에 머문다는 걸. 이것은 바로 나의 엄마와 그녀의 둘째딸인 나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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