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를 움직이는 일만의 숭고함이 있다. 몸을 쓰는 순간 웬만한 생각은 멈춰지고, 몸을 다 쓰고 나면 이전까지 했던 생각이 조금 달라져 있기도 하다. 생각하는 게 일인 이들 중엔 산책자가 적지 않다.
(강은경 지음, 어떤책 펴냄)은 평생 소설가를 지망해온 50대 여성이 아이슬란드 전역을 트레킹한 71일간의 이야기다. 여행기를 읽는 이유는 낯선 곳을 향한 상상과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서다. 게다가 몸을 움직인 끝에 나온 글이라면? 이 책은 여행기에 대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재미와 기대를 만족시키며 좀처럼 얻기 힘든 희귀한 감동마저 준다.
지은이는 등단은 하지 못했지만 꾸준히 소설을 써온 인물이다. 대필 작가, 식당 보조 등으로 글 쓸 돈을 벌어 30년간 신춘문예에 도전했다. 그가 글쓰기에 대한 꿈을 접은 것은 쉰을 앞둔 어느 순간이었다.
“이제 나는 쉰셋이 됐다(깜짝이야!).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은 돋보기안경을 쓰면서 시작됐다. 글자들이 탁한 물속에서 헤엄치는 치어 떼처럼 보였다. ‘노안’이라고 했다. 퍽! (…) ‘내 인생은 실패했다’는 절망감이 밀려왔다. 사회적 지위, 돈, 명예, 사랑, 결혼, 꿈. 그것들 중 변변하게 이룬 것이, 가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 다음으로 가졌던 목표인 아이슬란드 여행 68일째. 그러니까 마무리에 접어든 어떤 여행길에서 작기는 이렇게 쓴다. “그 밤 내내 콧물, 눈물, 재채기가 멈추지 않았다. 재채기를 할 때마다 마치 땅 위로 올라와 파닥거리는 물고기처럼 몸부림쳤다. 내 몸에서 비늘이 다 떨어져나가는 것 같았다. 비늘을 다 털고 나는 내일 무엇으로 다시 태어날까?”
오랜 여행을 거친 뒤 작가는 “희귀하고 대담하고 용감한 여행자”로 태어났다. 평생을 붙든 활자가 탁류 속 물고기 같던 침침한 날이 마침내 맑게 갰다.
작가는 아이슬란드 곳곳을 오가며 이동은 히치하이킹을 통해, 숙박은 야영으로 해결하며 버텼다. 아이슬란드는 물가가 비싸 장기 여행자가 드문 곳이다. 낯선 도로에선 60여 명의 운전자가 문을 열어줬고, 길 위에선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이 도움을 줬다. “그 행복감을 맛보려면 감내해야 할, 통과의례 같은 게 있었다. 추위, 바람, 기다림, 외로움.” 험한 땅에서 위치정보시스템(GPS)도 없이 지도 한 장 달랑 든 무모한 여행자를 실패한 사람으로 보는 눈은 없었다.
“당신, 인생 실패한 사람 맞아요?” “네?”
“쓰고 싶은 글 쓰며 살았잖아요. 그랬으면 됐지, 왜 실패자라는 거죠? 당신에겐 사는 게 뭐죠?”
사람을 살게 하는 에너지는 애써 만드는 게 아니고 그냥 ‘앞’에 있는 것이다. 대자연 앞에 선 지은이에겐 몸 어디에도 줄 힘이 없었다. 자기 앞에 주어진 에너지와 마주한 작가는 그렇게 “몸을 떨”고 “무릎을 꿇”고 “눈물이 솟구”치는 과정을 통해 이를 그저 받아들인다. “뭐가 되고 못 되었다는 게 어떻게 우리의 결말일 수 있겠어요?” 더 이상 빛나려 애쓰지 않기에 빛나는 문장들이 우리가 잊고 지내는 하나의 진실을 다시 한번 증명해낸다. 에너지란 빛을 발하려는 자가 아니라 빛을 머금는 자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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