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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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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 업

등록 2017-02-10 17:40 수정 2020-05-03 04:28

낚였다.
“나는 포세권 주민이다. 저만치 보이는 체육관은 한겨레신문사. 2박3일… 하얗게 불태웠다.” 인턴기자를 했던 20대 페친(페이스북 친구)이 분홍 꽃가루가 휘날리는 게임 캡처 사진과 함께 적었다. “우리 회사가 체육관이라고?” 궁금했으나 차마 묻지는 못했다.
“오우 회사가 체육관이었음.” 이번엔 회사 후배가 페이스북에 비슷한 포스팅을 올렸다. “회사가 포켓스탑이면 좋을 텐데~.” 다른 후배가 댓글을 달았다. ‘체육관은 한국말인 게 분명한데 포세권, 포켓스탑은 뭐람. 무슨 암호도 아니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콜라병을 처음 본 부시맨이라도 된 느낌이었다. 설 연휴 직전부터 페이스북을 온통 뒤덮은 이 정체불명의 용어들은 모두 (PokeMon GO)라는 모바일게임 때문이다.
포켓몬 고, 정체불명의 용어들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그냥 게임이라면 솔직히 안물안궁(안 물어보고 안 궁금)했다. 1990년대 중반에도 학교 앞 PC방에서 한 번 해본 적 없는, 중독될 만큼 몰입해본 게임이라고는 가 마지막인, 유희적 인간과는 거리가 먼 인간이었으므로. 게다가 ‘주머니 속 괴물’(포켓 몬스터)이라니. 잘생긴 도깨비(공유)와 멋진 저승사자(이동욱) 열풍에도 꿋꿋이 ‘안궁’했는데, 귀여운 괴물 따위에 무너질 수 없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낚일 듯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제주도에 사는 친구가 “동네가 포켓몬 사막 같다”며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서울과 지방 간에 포켓몬이 등장하는 횟수에 심각한 격차가 있다며 도시와 농촌, 수도권과 비수도권 사이 ‘지역 불평등’을 논하는 목소리까지 가세했다. 각종 조형물이나 유적 등이 게임의 핵심 방문지인 포켓스탑이어서 탐험과 주변 풍경 낯설게 보기 효과까지 있다는 예찬론까지 더해졌다.

‘혹시 게임에 뭔가 심오한 사회적·문화적 의미와 맥락이 담긴 것 아닐까?’ 마침 낮에 취재 갔던 대학교 곳곳에서도, 밤에 기사 쓰러 들어간 커피숍 곳곳에서도 사람들이 하나같이 휴대전화 화면에 대고 검지손가락을 튕기는 게 아닌가. 이번에는 그 열광의 정체가 못내 궁금해졌다. 페이스북과 카카오톡으로 지인들에게 ‘왜 를 하느냐’고 물었다.

포켓몬을 종류별로 모으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래서 수집욕과 성취욕을 자극한다, 증강현실 게임 덕분에 하루에 만보씩 걸어다니는 재미가 생겼다, 평소 안 가던 지역까지 모험하듯 구경 다니니 좋다, 어릴 때 좋아했던 애니메이션이라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만화 주인공처럼 향수를 느끼면서 아이들과 함께 하니 일석이조다 등등. 반면 이미 해외에서는 유행이 지나갔고 게임으로서 흥미가 떨어지는 편이라 유행이 오래가지 못할 거라는 의견도 있었다.

게임 지도에 놓인 갈림길을 바라보다

어쨌든 결국 낚였다.

휴대전화에 애플리케이션을 깔고야 말았다. 깔자마자 집에서 3마리, 회사에 오자마자 단번에 3마리를 잡아 레벨이 상승했다. 는 게임 출시 7개월 만에 최단기간 10억달러(약 1조원) 매출 신기록을 세웠다고 한다.

게임 속 지도에 놓인 갈림길들을 물끄러니 바라보다 말고, 문득 친구가 페이스북에 지도와 함께 올려놓은 노래 가사를 흥얼거리는 나를 발견했다.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날 데려가는지 알 수 없지만 오늘도 난 걸어가고 있네. …이 길의 끝에서 내 꿈은 이뤄질까.”

이렇게 독자들은 무료한 일상을 흔들 ‘판타지’를 갈구하는데, 종이 위에 쓴 2차원적 따분한 기사는 도대체 어떤 길을 보여줘야 할까. 시리아 내전 현장으로, 아프리카 난민의 삶 속으로, 시민들이 오가는 미국 뉴욕 거리로 독자를 직접 데려가는 가상현실(VR) 또는 증강현실(AR) 저널리즘이 다른 길을 보여줄 수 있을까. 한겨레 ‘체육관’에서 우리는 ‘레벨 업’ 될 수 있을까.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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