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개가 필요한 역사는 없다. 역사학자 오항녕 전주대 교수는 “역사에서 해석이 없어도 사실은 남지만, 사실이 없으면 해석은 애당초 가능하지 않다. 그러므로 모든 역사 논쟁은 사실을 둘러싼 기억투쟁의 성격을 띤다”고 했다.
2000년대 이후 권력자들의 ‘기억투쟁’이 공공기록물, 특히 대통령기록물을 둘러싼 ‘기록전쟁’ 형태로 나타난 게 대표적이다. 참여정부 당시 대통령기록물관리법이 만들어졌다. 이전까지는 대통령기록물 생산과 관리·유지·보존 개념은 없다시피 했다. 전 대통령 박정희가 1975년 미국 언론인 로버트 노백과의 면담 보고 내용을 결재한 ‘청와대 국제정치특별보좌관실 문서’가 지난해 인터넷 경매사이트에서 팔렸고, 2013년엔 그의 대통령 취임사 서면 원고가 520만원에 거래될 정도로 관리가 허술했다. 그나마 박정희 시절 남은 대통령기록물은 5만2729건에 불과하다. 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정부 때도 재임 기간 기록물이 4만~10만 건 정도였다. 참여정부 시절 대통령기록물이 750만 건 제작된 점과 비교된다.
대통령기록물이 ‘기록전쟁’으로까지 비유되는 까닭은 그 내용의 폭발력이 엄청나기 때문이다. 2008년 한나라당이 노무현 전 대통령을 상대로 제기한 ‘대통령기록물 봉하 유출 사건’이 그랬다. 노 전 대통령이 이명박 당시 대통령을 향해 “(대통령기록물을 갖고) 전직 대통령과 정치게임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라는 당부까지 했지만 소용없었다. 당시 정부와 한나라당은 이 사건을 불꽃처럼 번지던 ‘광우병 소고기 파동 촛불집회’의 진화를 막는 데 악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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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전 대통령의 경우, 비밀기록 또는 대통령 지정 기록물에 담긴 것으로 보이는 외교 비화를 퇴임 뒤 자서전 에 담아 또 한 번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글쓴이는 “그 비밀폭로가 우리 외교사에 큰 오점으로 남을 것인데도… 덕분에 책은 베스트셀러를 기록하며 현재도 대형 서점에 전시되고 있다”고 말했다.
박근혜 정부 들어, 2013년엔 국가정보원이 ‘2007년 노무현-김정일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해 파문이 일었다. 당시 기록학계에선 ‘현대판 사화가 일어났다’는 말까지 나왔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도 대통령기록물과 관련해 웃지 못할 일도 많았다. 세월호 참사 당시 대통령 지시사항을 공개하라는 소송이 제기되자, 청와대는 이 자료들을 ‘대통령 지정 기록물’로 지정해 대통령의 행적을 숨길 장치로 악용했다.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이 작성한 문건을 통해 ‘청와대 비선 실세 정윤회’ 파문이 일었을 때는, 청와대가 이 자료를 “근거 없는 풍설을 모은 지라시(증권가 정보지) 내용을 모은 것”이라며 대통령기록물을 스스로 부정해 실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글쓴이는 “대통령기록물이 정치권의 이해관계에 악용되는 도구가 됐다. 대통령은 기록을 남기고, 후임 대통령이 그 기록을 보호하는 문화를 만들기 위한 사회적 대합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홍석재 기자 forchis@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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