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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무덤에서

등록 2016-08-20 15:26 수정 2020-05-03 04:28
박승화 기자

박승화 기자

밤 11시. 남녀 다리가 닿았다. 남자의 왼쪽 다리와 여자의 오른쪽 다리. 하나는 내 것이요, 하나는 그녀의 것이다. 착잡한 퇴근길 시내버스, 맨 뒷자리. 모르는 아가씨가 곁에 끼어앉았다. 비어 있던 공간은 웬만큼 날씬하지 않으면 엉덩이를 들이밀기 힘들 만큼 좁았다. 그녀는 피곤했나보다. 양쪽에 사내를 두고 그 사이를 파고들었다. 주저 없었다. 내가 움찔했을 뿐. 소주 냄새가 났던가. 잘 익은 복숭아처럼 아가씨 얼굴이 발그레했다. 예뻤다.

책에 기대어, 사람에 기대어

그리하여 ‘접촉’은 발생한 것이다. 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아가씨 바지는 왜 그리 얇은가. 팝송 (Touch by touch)가 생각날 정도였다. 그 노래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skin to skin”(살갗에서 살갗으로). 순간 심장이 일을 냈다. 오래된 경운기 엔진처럼 덜컹, 돌연 날아오르는 비둘기처럼 파드닥. 고개 돌려 창밖을 보았지만, 두방망이질하는 가슴은 이미 이성으로 통제 불가능. 심장도 급발진을 하는구나 생각했다. 아, 이성은 얼마나 허약한가. 42살 총각 기자는 기진맥진했다.

꾀를 내야만 했다. 누구는 속으로 구구단을 외운다지만, 나는 시 하나를 떠올렸다. “오늘의 생활이 있을진대/ 달관한 신문기자여/ 생각하지 말아라”(김수영 시 ‘기자의 정열’ 부분) 마지막 대목을 수없이 되뇌었다. 생각하지 말아라, 생각하지 말아라, 생각하지 말아라…. 당첨된 복권처럼 집 앞 버스정류장이 눈앞에 보였다. 창피한 얼굴로 후다닥 버스에서 내렸다. 돌아서서 버스를 보았다. 아가씨는 졸고 있었다. 아, 착각은 얼마나 허망한가.

아마 그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절박(切迫). 아니라면, 기사에까지 아가씨를 빗댄 표현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날렵한 아가씨의 하얀 스커트에 묻어버린 김칫국물처럼, 경희씨의 고운 목소리에는 쓸쓸함과 고단함이 묻어 있었다.”(제1065호 우리 시대의 장발장들⑤ ‘밥도 못 먹고 병원 가는 내 딸’) 절박하지 않다면, 시시때때로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로 시작하는 시(이수익 ‘우울한 샹송’)가 생각날 리 없다. 가짜로 절박하다면, 예쁜 아가씨를 보고 그렇게 자주 마음에 풍차가 돌지는 않을 것이다.

뉴스룸, 나의 자리 ‘책무덤’에서 절박을 생각한다. “그저 모든 것을 벌거벗겨 내놓을 뿐, 아무것도 설명하고 추론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드러나 거기 놓여 있으므로, 설명할 것이 아무것도 없기도 하다”(비트겐슈타인)라고 말할 수 있는 기사를 쓸 능력이 나에게는 없다. 그러므로 책에 기대어, 사람에 의지해, 우리 사회의 개선을 조금이나마 꿈꾸고 싶었다.

떨림, 변화의 단초

속내는 잘 모르겠지만, 편집장이 기회를 주었다. 책벌레인 줄 알면서 신간 관리를 주문했으니, 고양이에게 고등어 손질을 맡긴 격이다. 가늠해보건대, 책과 현실의 거리는 아득하다. 절박하다는 게 성취의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라는 걸 안다. 책상물림의 소견으로 비통한 현실이 바뀔 리 없다. “연대는 책에서 나온다”(제1117호 표지이야기 ‘사회를 전복시켜온 슬픔을 믿는다’)고 믿을 뿐이다. 도 엄연한 책 아닌가.

나의 심장을 경운기 엔진으로 바꿔버린 그 아가씨처럼, 나의 모자란 기사도 한번쯤 시민들에게 전율을 주었으면 좋겠다. 떨림. 사랑의 시작, 변화의 단초이므로.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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