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중반 사람들은 ‘광주 비디오’를 봤다. 정부가 지시해 민간인 학살이 벌어진 ‘5·18의 진실’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이다. 국외 텔레비전 방송사의 자료 화면을 짜깁기한 ‘광주 비디오’. 그 속에서 1980년 5월 전남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평범한 시민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국가가 저지른 끔찍한 폭력에 맞서 시민들이 처절하게 저항하는 모습도 고스란히 품었다. 검열과 가공을 거친 국내 언론에선 볼 수 없는 장면들이었다.
시대를 움직였던 다큐 영화‘독립다큐영화’란 말조차 없던 시절이었지만, ‘날것’ 그대로인 영상의 힘은 폭발적이었다. 하루 3~4회 상영되는 영화를 보기 위해 시민들이 서울 중구 명동성당 문화관을 매회 가득 채웠다. 당시 현장은 이렇게 기억됐다. “예상외로 많이 몰려온 사람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성당 유치원의 마루가 내려앉았고, 그 일은 두고두고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2003년).
‘광주 비디오’ 상영 뒤 꽤 많은 영화·영상 운동 집단이 생겨났다. 다큐영화가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분명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사라졌다. 남은 이들도 대개 영화 대중과 멀어진 게 현실이다.
사회성 짙은 다큐영화의 힘은 여전히 유효한 것일까? 문정현(40) 감독은 “‘세상을 보는 또 다른 창’으로서 다큐영화의 힘은 분명하다. 관객 대신 현실에 다가서고 진실을 보여주는 게 다큐멘터리의 역할이다. 영화가 사람들과 그들의 현실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킬 것으로 믿는다”고 답했다.
문 감독은 2001년 독립다큐멘터리 제작집단 ‘푸른영상’에 합류했다. 비극적인 현대사가 개인에게 끼친 아픔( 2007)이나 국가 폭력( 2010), 환경 파괴( 2011), 아동 성범죄 피해( 2012), 성적·종교적 약자( 2014) 문제를 천착해왔다. 영화 개봉을 하루 앞둔 6월29일 서울 마포구 상수동 한 카페에서 문정현 감독을 만났다.
“국경 없는 나라가 많이 있다면…”“최근 몇 년 사이 사회성 짙은 문화활동에 대중이 쉽게 접근하거나 나서기 어려운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넓게 퍼진 것 같다. 현실이 엄중할수록 대중이 현실을 고민하게 만들 다양한 수단이 있어야 한다. 이럴 때 다큐멘터리의 구실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영화 관객의 스펙트럼도 좁아졌다. 특히 현실 사회를 정면 비판한 다큐멘터리 방식에 부담감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독립다큐영화야말로 사회적 소수자·약자 문제를 선제적으로 제기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관객의 영역이 좁아졌다고 해도 소수자와 함께 살아가기, 약자와 어깨겯기를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 다큐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대중 장르로서 유효할 것이다. 다른 영역에서도 ‘다큐영화스러운’ 시도가 이뤄지면 세상은 조금씩이나마 살기 좋게 변하지 않을까?”
문 감독이 이번에 내놓은 는 여러 나라에서 민족·지리·정치·경제적 이유로 ‘국경’ 밖에서 살아온 이들의 삶을 다뤘다. 문 감독은 세르비아 출신 블라디미르 토도로비치 감독, 인도네시아 출신 다니엘 루디 하리얀토 감독 등과 서신을 나누며 다른 국가에서 ‘경계’에 선 이들을 영상으로 담아냈다. 해체된 나라의 이름이 적힌 표지판으로 배를 만드는 한 인물의 대사가 눈길을 끈다. “국경 없는 나라가 많이 있다면 세상은 훨씬 재미있는 곳이 될 거야.”
는 어떤 영화인가.“‘경계’를 넘을 수 없어 고통받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었다. 하리얀토 감독이 일본으로 이주해 결혼한 인도네시아 여성 누리와 인도네시아에 정착한 베트남 보트피플의 ‘향수’ 이야기를 한다. 그러면 토도로비치 감독이 일자리를 얻기 위해 아시아 각지에서 싱가포르로 몰려든 저임금 노동자들의 고된 삶을 이야기로 풀어 답하는 식이다. 나는 두 가지를 이야기했다. 하나는 남아프리카공화국 ‘디스트릭트 6’에서 평화롭게 살던 이들이 인종차별 정책 탓에 도시 외곽으로 쫓겨난 사연이다. 이들을 통해 ‘용산 남일당’에서 목숨과 삶의 터전을 잃은 한국 현실을 돌이켜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해방 뒤 이념 갈등으로 각각 북한과 일본에 남아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내 이모와 삼촌 이야기다.”
우리 사회에서 ‘경계’란 무엇일까?“경계는 너무 흔한 것이 됐다. 집단뿐 아니라 개인끼리도 필요에 따라 상대를 배제하고 타자화한다. 경계짓고, 밀어내고, 비주류를 배척하는 대가로 무언가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돌아가도록 구조화된 사회의 부조리함을 풀어내고 싶었다.”
영어판 제목 ‘유동적 경계’(Fluid Boundaries)라는 말이 의미심장하다.“원제가 영화의 의도를 더 잘 설명했다. 특정 국가나 민족은 모두 뚜렷한 경계가 있다. 여권·비자·국민·시민 같은 흔한 개념도 의식 또는 무의식적으로 쓰이는 경계다. 밖으로 밀려난 이들은 혹독한 차별과 억압을 견뎌야 한다. 폭력적이다. 경계가 ‘선(線)적 개념’이 아니면 어땠을까? 바닷물처럼 흘러다니는 것이면 어땠을까? ‘유동적 경계’가 있다면 세상이 더 평화롭겠다는 상상을 해봤다.”
‘윗집 한열이형’과 영화문 감독은 우리 현대사가 품은 비극과 여러 접점을 갖고 있다. 외할머니 가족은 해방 뒤 이념 문제로 형제가 총살당하며 풍비박산했다. 1976년생인 문 감독은 호남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87년 6월항쟁 때 숨진 이한열은 문 감독의 어머니가 “한열이형만큼만 열심히 공부하라”고 말하던 ‘윗집 형’이었다. 친누나는 한때 ‘남대협 여전사’로 불린 강성 운동권이었다. 이번 영화에서 문 감독은 재일조선인과 북송월북인으로 평생을 산 자신의 삼촌과 이모 이야기를 했다.
문 감독의 가족사가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 같다.“외할아버지는 해방 뒤 이념 갈등을 피하기 위해 외삼촌과 이모를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재일조선인 차별이 심했다. 이모는 다시 북송선을 타고 북한으로 건너갔다. 일본에 남은 외삼촌은 언젠가 이모를 만나기 위해 수십 년간 조선적을 버리지 않았다. 어느 날 이모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외삼촌은 북한으로 건너가 장례를 치러야 했다. 그리고 65년 만에 한국 국적을 얻어 고향에서 가족을 만났다. 가족의 허락을 얻었고, 영화에 담을 만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은 보다 앞선 이야기였다. 해방 뒤 좌익 소탕 작전 때 경찰이 할머니의 큰오빠를 살해했는데, 그 경찰이 할머니의 친구 아버지였다. 우발적 사고가 아니라 큰오빠의 자수를 위해 믿고 맡긴 친구 아버지가 총을 쏜 것이다. 외할아버지는 심한 고문 끝에 자살했고 가족은 풍비박산했다. 이 이야기는 우연히 발견한 외할아버지의 일기에서 시작했다.”
‘영화 같은’ 독특한 가족사다.“실제로 어느 평론가한테 ‘가족 이야기로 다큐 감독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웃음) 그 평론가는 ‘너한테 왜 그런 일이 많냐. 다큐 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했다. 역사적 특수성을 지닌 ‘호남’에서 성장한 영향이 컸을 것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야기에 나온 경험은 특수한 게 아니다. 호남 사람이라면 누구나 ‘내 얘기’ 혹은 ‘이웃 얘기’로 알고 있는 것들이다. 당사자가 아니어도 다리 하나 건너면 옆 동네 일이었다. 모두 쉬쉬하는 것을 수면 위로 끌어온 것뿐이다. 상영회에 가보면 ‘나도 그랬다’는 사람이 많다. 호남 사람뿐 아니다. 그 시절을 보낸 누군들 현대사의 풍랑 속에서 자유로울까?”
문 감독의 현실은 영화에 어떻게 반영되나.“이제껏 만든 영화들은 대부분 이야기가 먼저 말을 걸어온 경우다. 은 우연히 시골에 갔다가 ‘외할아버지 일기장’을 보면서 시작됐다. 도 그랬다. 남일당 옥상에서 컨테이너가 타들어가는 장면을 인터넷으로 봤다. 죽음을 목격하는 순간 그림처럼 장면들이 떠올랐고 용산에 들어가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사회를 비추는, 지독하고 깊고 큰 거울‘다큐’인터뷰 끝에 문 감독은 “주위 다른 다큐 감독들이 사회적 소재를 다루는 방식은 지독하고 깊고 크다. 고민하는 주제도 다양하다. 그들 틈에서 나는 평균 이하의 비판적 감성을 가진 것 같다”며 웃었다. 그러나 그는 “서로 다른 접근 방식이 우리 사회를 보는 시각을 조금 더 풍성하게 해줄 거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문 감독은 다음 작품으로 ‘차별’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다. 재일조선인, 위안부 피해 할머니, 북한이탈주민 등 3명이 ‘피차별의 고통’을 말한다. 그는 “다큐가 우리 사회를 비추는 가장 투명하고 정확한 거울이면 좋겠다”고 말했다.
홍석재 기자 forchis@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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