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집안에서 유일하게 고양이 귀와 꼬리를 달고 있는 사람이다. 익명의 웹툰 작가 단지(33)는 만화에서 자신을 그렇게 그린다. 가족 구성원 가운데 늘 다른 존재로 취급받는 사람, 차별을 일상적으로 겪는 사람. 가족은 길게 늘어진 작가의 꼬리를 아프게 밟고도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아 밟고, 또 밟는다. 짓이겨진 상처가 쓰려 눈물 흘릴 때마다 하소연할 곳 없는 그는 일기를 써왔다. 슬픔과 억울함과 분노와 답답함이 뒤섞인 문장이 일기장에 빼곡하다. 그렇게 쏟아내고 마음을 다독이는 걸 십수 년 넘게 해왔다.
31살이 되던 해 일기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보기로 마음먹었다. 언젠가 꼭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그림으로 차곡차곡 다시 쌓아나갔다. 그렇게 연재하기 시작한 웹툰 는 이 웹툰이 실린 레진코믹스 사이트에서 최단기간, 최다 조회 수를 기록하며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단지는 시즌1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크고 작은 상처의 경험을 기록했다면, 시즌2는 비슷한 경험을 가진 독자들의 이야기를 모아 쓴다. 시즌1을 쓸 때부터 가정에서 정서적·물리적 학대를 받아왔던 사람들의 사례를 받는다고 공지했다. 247명이 전자우편을 보내 자기 이야기를 대신 좀 해달라고 문을 두드렸다. 이제 막 시즌2를 시작해 한창 작업 중인 단지 작가를 4월19일 화요일 오후 서울 역삼동 레진코믹스 사무실에서 만났다.
“나는 깨물어 잘린 손가락 같았다”“오늘은 참을 수가 없어 손목을 그었다.” 작업 초반, 웹툰을 시작하기로 마음먹고 집에서 일기장을 가지고 나온 지 3주가 되도록 그는 일기장을 펼쳐볼 수 없었다. 겨우 마음을 다잡고 열어본 일기장에는 지울 수 없는 상처가 촘촘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단지의 아버지는 전형적인 가부장이다. 아버지는 “내 제일의 자랑은 한 번도 널 때리지 않은 거다”라고 말하지만, 단지가 입은 상처는 정서적 학대로부터 기인한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의 폭력적 언사에 짓눌린 여성이다. 딸의 편이 되어주기는커녕 자신이 받은 상처를 딸에게 더 크게 돌려준다. 부모의 이런 태도 때문인지 단지의 오빠도 그를 단 한 번도 귀하게 여긴 적이 없다. 자존감을 짓밟는 언행은 일상이고 때때로 물리적 폭력을 행사했다. 남동생과는 잘 지낼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가족으로부터 늘 소외와 차별을 받는 단지는 그마저도 좋은 관계로 엮어나갈 힘이 없었다.
그럼에도 시즌1에서는 자신의 상처를 담담하게 한 걸음 떨어져 들여다보고 있다. 이런 시선을 가지기까지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을 듯한데, 자전적 이야기를 웹툰으로 그리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원래 다른 작품을 준비하고 있었다. 회사 시트콤물이었는데, 그 작품을 다른 플랫폼 담당자와 논의 중이었다. 그런데 담당자가 콘티 2화까지 나온 원고를 쭉 보더니 “아, 이거 이상하게 재미가 없다”며 자꾸만 반려를 했다. “네가 진짜 하고 싶은 얘기가 뭐냐”며 자꾸만 나를 자극했다. 웹툰 작가가 된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데, 사실 내 이야기를 다른 작품에서 문득문득 하긴 했다. 하지만 이걸 통째로 쓸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상대방이 자꾸만 진짜를 꺼내놓으라고 물어보고, 마침 그 무렵 집에서 또 한 번 나를 뒤엎은 적이 있었다. 이게 맞물리면서 ‘단지’를 그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작업하기 시작했다.
‘단지’는 무슨 뜻인가.자식들을 빗대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고 이야기하지 않나. 나는 깨물다 못해 잘린 손가락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뜻이다.
연재 뒤 최단기간, 최다 조회 수를 기록할 정도로 반응을 얻었는데, 예상했나.몰랐다. 신기했다. 처음에 나는 이게 이슈가 될 만한 소재라는 생각조차 못했다. 불편한 이야기이니까. 그리고 가정에서 나와 같은 대우를 받는 사람이 이토록 많을 줄 몰랐다. 연재 시작 전에 10화 정도 미리 그려놓고 연재에 들어갔다. 그러니까, 10개를 그리는 동안은 어떤 반응이 있을지 예측하지 못한 채 작업해야 한다. 그때 힘들었다. 막상 공개했는데, 나에겐 정말 힘든 경험이었는데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아 하면 정말 슬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팠던 경험을 들추고 그걸 다시 기록하는 작업이었다. 감정도 여러 번 엎치락뒤치락했을 것 같은데.앞서 말한 10화까지의 작업이 힘들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내 기억 속에서 안 좋았던 옛날 일들이 앞쪽(청소년기)에 몰려 있기 때문이다. 그 시간이 지나고 뒤로 갈수록 차분해지는 감정을 느꼈는데, 그래도 작업하면서 울컥해 운 적이 많다. 엄마를 만나서 나한테 왜 그랬냐고 얘기하는 장면이 가장 많이 힘들었다.
말하지 못해 외면받은 상처유년기 시절부터 엄마에게 이유 없이 매질을 당했다는 아이가 있었다. 17살이 되어서야 TV에 나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7살 때부터 맞았어요. 밥 먹고 나면 ‘자, 이제 맞아야지’ 했어요.” 시즌1, 11화에서 TV를 보며 이 사연을 접한 단지는 ‘그래도 내가 쟤보다는 낫나’라는 생각을 하며 맥없이 화면을 바라보다가 어떤 장면에서 아이와 함께 운다.
폭력의 경험을 시종 담담하게 말하던 아이는 동생과 차별받던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을 쏟았다. 가위로 머리를 맞은 기억보다 자기가 보는 앞에서 동생에게 웃으며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어주는 부모의 모습을 보는 것이 아이에겐 더 잔혹한 시간이었다. 정서적 학대가 더 큰 상처로 남았던 것이다.
단지가 쓴 이야기에 지지와 응원, 공감을 표하는 이들은 가슴속에 시퍼런 멍을 잔뜩 짊어진 사람들이다. 가정폭력은, 특히 정서적 폭력은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일어나는데다 신체적 폭력처럼 시각적으로 드러나지도 않는다. 그런 이유로 외부에서 발견되기 힘든 경우가 많다.
단지 작가에게 전자우편을 보내온 수백 명의 사람들 중에 다수가 “제 얘기가 웹툰으로 그려지지 않아도 괜찮다. 다만 이렇게 말이라도 하고 나니 속이 시원하다”라고 말했다.
내가 이 웹툰을 그린 이유는 가족한테 정서적 학대를 받았다는 것을 가족에게 한 번도 얘기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 말고도 그런 상처를 묻어두고 사는 사람이 아주 많은 것 같더라. 억울한데 억울하다고 말도 못해본 게 정말 답답했다. 그런 답답함과 억울함을 풀어주고 싶어서 사연을 받았다.
주로 어떤 내용들인가.나와 비슷한 사례가 많다. 가정 불화와 거기에 동반되는 정서적 학대 또는 육체적 학대.
본인 얘기보다 다른 사람의 사연을 웹툰으로 그리는 과정이 더 힘들었을 것 같다. 작업은 어떻게 진행됐나.전자우편으로 사연을 받고, 몇 건을 추려 사연자분들을 인터뷰했다. 마주 앉아서 그리고 싶은 방향을 먼저 설명했다. 아프겠지만 그 사건에 대해 집중적으로 물어봤다. 예컨대 어떤 사건에 대해 써야 하는데, 솔직히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 직접 물어보지 않으면 한마디도 쓸 수 없었다. 그때 아빠 표정이 어땠나요, 당신은 어떤 감정이었나요, 라고 일일이 물어봐야 했다. 처음에는 상처를 가진 분들의 답답함을 풀어드리고 싶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막상 진행하다보니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작업이었다.
상처의 경험을 구체적으로 질문하는 게 힘들지는 않았나.나도 내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도 않았는데, 심리상담사가 된 것처럼 계속 감정을 물어보고 아픈 기억을 꼬집는 질문을 하니까 정말 미안했다. 인터뷰이에게 사과도 했다. 그렇지만 상황을 내 마음대로 묘사할 수 없으므로 자세히 묻는 게 필요해서 그런다고 양해를 구했다.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끼리 연대하며 공감과 위로를 나누는 과정이기도 했을 것 같다.가정에서 정서적 학대를 받는 사람들이 가진 가장 큰 문제점은 이것이 잘못됐다는 것을 모른다는 거다. 물론 상처받고 우울하긴 하다. 하지만 이게 당연하다는 느낌이지 잘못됐다는 걸 몰랐다. 나도 ‘우리 집 이상한데?’ ‘내가 받는 대우가 정상이 아닌데?’라고 느낀 것이 20살 중반부터였다. 근데 독자들이 보내는 메시지를 보면 나처럼 자신이 처한 현실이 정상이 아니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정말 많다. 내 만화를 보고 그때 알았다는 사람도 있다. 나도 많이 헤매고 있지만, 이렇게 서로 위로하는 작은 소통 창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연대하고 위로할 창구 있었으면 우리 주변 또 다른 ‘단지’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정보를 나누는 창구가 있으면 좋겠다. 어떻게 견뎌왔냐고 묻는 사례자들에게 내가 시도했던 방법을 공유했다. 나는 힘들 때 정신과를 찾았다가 돌고 돌아 심리상담소에 갔다. 병원은 우선 비싸고, 약물로 관리하려는 측면이 크다. 심리상담소도 비용이 저렴하진 않은데, 지원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다. 나는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의 지원을 받아 그곳에서 선정한 상담소에 갔다. 전자우편을 보내온 사람들에게 거기가 어딘지 알려주기만 해도 되게 반기시더라. 스스로 치유하는 방법을 찾으려 애쓰는 사람에게도 이처럼 정보의 벽이 높다.
사람들과 소통하며 가장 위로가 된 순간은 언제인가.“네가 잘못한 게 아니야”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마음이 울렸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카카오톡에서 을 선물하세요 :) ▶ 바로가기 (모바일에서만 가능합니다)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천공 “국민저항권으로 국회 해산”…누리꾼들 “저 인간 잡자”
김민전에 “잠자는 백골공주” 비판 확산…본회의장서 또 쿨쿨
박종준 전 경호처장 다시 경찰 출석…김성훈 차장은 세번째 불응
연봉 지키려는 류희림, 직원과 대치…경찰 불러 4시간만에 ‘탈출’
경호처, ‘김건희 라인’ 지휘부로 체포 저지 나설 듯…“사병이냐” 내부 불만
“김건희가 박찬욱에게, 날 주인공으로 영화 한편 어때요 했다더라”
25년 경호 공무원의 조언 “대통령 ‘개인’ 아닌 ‘공인’ 지키는 것”
중립인 척 최상목의 ‘여야 합의’…“특검도 수사도 하지 말잔 소리”
“설탕음료 탓 연 33만명 사망”...미 연구진, 공중보건 위기 규정 [건강한겨레]
건강한 정신, ‘빠져나오는 능력’에 달렸다 [.t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