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쓰는 오늘(2016년 3월9일)은 먼 미래에 기념할 만한 날로 기억될지 모른다. ‘인류 대표’로 나선 이세돌은 구글 딥마인드의 인공지능 ‘알파고’와의 첫 바둑 대국에서 졌다. 그런가 하면 오늘치 신문에는 유럽과 미국 등 선진국뿐 아니라 우리나라 2030세대의 소득증가율이 사상 처음 감소했다는 뉴스가 등장했다. 자본주의 역사상 최초로 일하는 젊은 층의 소득 증가가 은퇴 고령층에 비해 뒤처졌다는, 즉 이 시대의 성장은 끝났다는 상징적 지표가 등장한 가운데, 복잡한 게임을 수행하는 인공지능의 “우아함과 아름다움”이 전세계에 공표되던 날.
부모처럼 살 수 없다어떤 페이지는 열리고 어떤 것은 닫히고 있다. 아니, 인류 시리즈물의 제1권 전체가 닫히고 있다고 해야 하나?
전세계에 지금의 청년 세대에 대한 별칭은 넘쳐난다. 우리에게 익숙한 일본의 ‘사토리 세대’(돈벌이도 출세에도 관심 없이 달관함)와 ‘나가라족’(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함), 중국의 ‘소황제 세대’(외동으로 태어나 황제처럼 자람), 대만의 ‘딸기 세대’(보기엔 예쁘지만 성질은 연약하고 무름)를 비롯해, 스웨덴의 ‘컬링 세대’(부모가 자식의 길 앞에 놓인 장애물을 깨끗이 닦아줌), 스페인의 ‘니니 세대’(일도 공부도 안 함), 노르웨이의 ‘시리어스 세대’(쾌락주의 경향과 멀고 테러 등 위험의 상시화에 공포를 느낌)까지.
이 모든 명칭들에선 하나의 흐름이 읽힌다. 이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이들은 발밑으로 빠져나가는 모래의 성 위에 서서 손톱을 물어뜯으며 서성이고 있다. 모든 것을 해야 할 것 같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래서 딴청을 한다. 이들 중 누군가 일상화된 위험을 감당할 수 없어 인종주의자나 테러리스트가 되든, 부모라는 언덕에 끝없이 비비고 있든, 다 놓아버리고 무기력과 냉소로 일관하든, 종교와 성(聖)의 세계로 탈출하든 그 출발점은 같다. 모래는 빠져나가고 문은 닫히고 있다는 것.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집값 상승, 불어나는 빚, 실업과 불안정한 일자리, 그 한가운데에서의 망설임과 머뭇거림. 이것이 소비자본주의에 갇힌 청년의 전 지구적 조건이다.
쇠망하는 시대의 끝자락에 매달린 우리 앞에, 오늘의 알파고가 당도했다. 이게 무슨 축구 A매치 같은 게 아닌데도 많은 이들이 국가대표를 응원하듯 인간대표 이세돌을 응원했다. 그가 패한 것에 허망해했다. 왜? 그가 한국인이라서? 아니면, 이세돌과 우리는 로봇이 아니라 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어느 쪽이든 이 이벤트가 실시간 중계되는 동안 사람들의 사고 회로는 조금쯤 바뀌는 것처럼 보였다. 대국을 지켜보는 내내 채팅창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댓글에 올라오는 수많은 말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인간의 직관이 그토록 대단한 능력이었는지, 인간이 느끼는 감정이란 게 얼마나 고유한 것인지, 인공지능 시대의 윤리와 로봇의 도전에 대한 인간의 선택은 어때야 하는지에 대한, 전례 없이 많은 생각이 오고 갔다. 머리로 아는 것과 가까운 곳에서 벌어지는 생중계를 지켜보는 일은 다르다. 한국에서, 이토록 많은 수의 대중이 동시에, 인간을 하나의 종족인 ‘인간종’(Human Species)으로 바라보게 되는 공동의 경험은 처음인 듯했다.
‘인간종’, 최초의 집단 경험우리의 N포/사토리/딸기 세대는 부모 세대를 비판하지만 동시에 소비자본주의가 부모 세대에게 약속했던 것과 같은 삶을 원한다. 안정된 일자리와 보금자리를 갖고 빚에서 탈출하는, 오랫동안 ‘보통의’ 삶이라 여겼던 것. 그러나 이들은 이제 부모와는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야 한다. 오늘의 경험은 어쩌면 로봇과 함께 이 땅을 나눠 차지하고 살아갈 젊은이들에게, 부자나 빈자, 성공한 자와 망한 자, 앞서거나 뒤처진 자가 아니라 ‘인간종’이라는 다른 층위의 보급형 카테고리가 열린, 최초의 집단 경험으로 기록될지도 모르겠다.
이로사 현대도시생활자※카카오톡에서 을 선물하세요 :) ▶ 바로가기 (모바일에서만 가능합니다)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말 바꾼 바이든, 우크라에 대인지뢰도 승인…민간 피해 우려
윤 ‘어쨌든 사과’ 질문한 기자에 “무례함 고치라”는 대통령실
[속보] 법원, ‘윤 명예훼손’ 혐의 김만배·신학림 보석 허가
민희진, 어도어 나간다…“반성 없는 하이브, 더 이상은 시간 낭비”
김혜경 ‘선거법 위반 혐의’ 2심 간다…“벌금 적다” 검찰도 항소
‘10만4천원’에 검찰 자신감…이재명 관용차 혐의 ‘증거 없이’ 추가
노동부 “뉴진스 하니, 노동자 아니다”…직장 내 괴롭힘 민원 종결
검찰을 그려봤더니 [그림판]
내가 쓰는 폼클렌저, 선크림 잘 닦일까?…‘세정력 1위’ 제품은
야당만 찌르는 칼 ‘윤석열 검찰’의 미래 [성한용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