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 창에서 보면 거대한 주상복합아파트가 보인다. 며칠 전 기분 나쁜 한기에 이른 아침 잠에서 깨어 화장실에 갔는데, 창밖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불투명한 우유의 장막, 백지였다. 꿈일까? 세수를 하고 다른 방의 큰 창으로 보니 그것은 짙은 안개였다. 어떤 윤곽도 보이지 않을 만큼 빽빽해서 거기에 있던 모든 것이 정말로 사라져버린 게 아닐까 생각했다.
현실과 닮은 소설 속 절망
TV 드라마 을 보면서 이 아침 안개가 떠올랐는데, 그러니까 두꺼운 안개 속에 있는 사이 진짜로 다 사라져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서실 카드나 크라운 맥주 같은 것만 사라진 게 아니라 사라졌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는 것까지 몽땅 사라져버렸다는 자각이었다.
이를테면 동네 젊은 부부들이 누군가의 집에 모여 잔칫집처럼 맥주를 마시고 먹고 노래하며 노는 일. 아이들은 좁은 방에 모여 엄마·아빠를 기다리는 일. 이제 그런 일은 없다는 걸 깨닫는다. 익숙한 그 풍경은 ‘추억팔이용 과거’에 속하기는커녕 있다고 말해야 할지도 몰랐던 것인데 이미 사라진 것이었다.
이웃 간의 정? 경제 호황? 가능성의 세계? 이런 말들은 더 이상 고려 사항조차 아니다. 여기는 이미 완전히 다른 종류의 세계다. 어른과 아이들은 모두 각자의 방에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실재하는지도 불확실한 이들과 접지하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들락날락한다. 삶으로부터 자신을 소외시키는 것의 목록은 점점 길어져 거의 모든 것이 되었다. 안개 속을 헤매는 사이, 장면전환은 일어났고 매일 또 다른 쇼트로 바뀌면서 어떤 결말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바깥 세계는? 붕괴 중이다. 3차 대전의 국면은 시작됐다. 전세계는 테러의 공포로 숨을 곳이 없으며, 다른 쪽에선 무슬림을 혐오하는 이들이 목소리를 높인다. 지구는 이미 여섯 번째 대량 멸종 단계에 진입했다. 대형 쓰나미와 지진이 끊이지 않고, 원전은 언제든 터질 준비를 하고 있다.
현실이 판타지가 되고 판타지는 현실이 된다. 미셸 우엘베크의 (2022년 이슬람 정권이 들어선 프랑스 사회를 그린 디스토피아 소설)은 더 이상 미래소설이라고 부를 수도 없을 것 같다. 프랑스 파리 테러 이후, 이 소설 속 상황은 디스토피아도 유토피아도 아닌 지극한 현실로 다가왔다. 파리 근교의 극우파 운동원과 이민자들 간의 반복되는 유혈 충돌, ‘내전’을 피해 파리를 떠나는 사람들, 이스라엘로 이민 가는 유대인 여자친구…. 이슬람 정권이 들어섰다는 소설적 사실만 빼고 보면 모든 게 현실과 유사하다.
이제 무엇이 ‘고독하고 비참한’ 우리를 구원해줄 수 있나? 세기말적 현대자본주의를 사는 소외된 개인은 갈수록 복잡·심화되는 삶의 역경들을 어떻게 돌파해야 할까.
을 읽으면서 가장 마음 쓰였던 건, 이제 다 그만두고 신의 발치에 엎드리면 아, 정말 편해지겠다 하는 생각이었다. 이슬람박애당이 정권을 잡아 주인공 프랑수아가 몸담은 대학이 이슬람 학교가 되면서 교육자들은 개종을 강요받는다. 그는 학교를 그만두지만, 한순간 직업과 사랑을 모두 박탈당하고 혼자 남은 삶에는 절망과 고독뿐이다.
모두에게 위안이 필요해19세기 소설가 조리 카를 위스망스 전문가인 프랑수아는 자연·퇴폐주의 소설가였던 위스망스가 삶의 어느 순간 가톨릭으로 개종한 사실을 줄곧 떠올린다. 그는 이슬람 대학 총장의 개종 권유(개종하면 아내와 일이 함께 생긴다)를 앞에 두고 위스망스 소설의 진짜 주제가 ‘소시민적 행복’이었다는 결론을 얻는다. “그의 눈에는 친구들끼리 둘러앉아 ‘적당한’ 와인을 곁들여 (…) 포토푀를 찍어먹는 즐거운 식사 시간이야말로 진짜 행복을 대변하는 풍경이었다. (…) 난롯가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자두주 한 잔을 걸치면 그만이었다. 삶은 이 단순한 기쁨을 위스망스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점차 개종이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신이 ‘실용적인 돌파구’로 여겨지는 세상. 가끔 성당에 앉아서 모두가 그저 위안이 필요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매일 아침 창밖을 보며 거기에 있던 것들이 사라졌는지 아닌지 확인할 필요 없이.
이로사 현대도시생활자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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