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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등록 2015-11-04 15:49 수정 2020-05-03 04:28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여기 두 장의 사진이 있다. 하나는 폐허가 된 도시의 한 구역을 비추고 있다. 성당의 종탑과 몇몇 커다란 건물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무너져내렸다. 그 안에 살았던 것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파괴다. 또 다른 하나는 현대식 건물들이 깔끔하게 들어선 전형적 메트로폴리스의 풍광이다. 여전히 살아남은 종탑 몇 개가 이곳이 앞의 사진과 같은 곳임을 말해주고 있다. 둘 중 어느 쪽을 기억할 것인가?

파괴와 재건 중에서

두 사진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가판대의 관광객용 엽서에 인쇄돼 있다. 하나는 1947년, 다른 하나는 1997년의 프랑크푸르트. 두 사진 사이에는 ‘프랑크푸르트-어제와 오늘’이라는 글씨가 자랑스럽게 쓰여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독일의 많은 도시들은 적국의 공습으로 철저히 붕괴됐다. 독일인들은 50년 만에 경탄할 만한 재건을 이뤄냈고, 그것을 전설로 만들었다. 그들은 파괴와 재건 중 ‘재건’ 쪽을 기억하기로 했다(고 해두자).

독일 작가 W. G. 제발트는 (1999)에서 사진 속 파괴가 “집단적 광기의 참담한 결말”이 아니라 마치 “성공적 재건의 첫 단계”라 할 만한 것으로 보인다고 비난한다.

책은 ‘삭제 기법은 모든 전문가의 방어 본능이다’라는 스타니스와프 렘의 말로 시작한다. 제발트는 이 책에서 현대 독일 사회가 나치와 관련된 과거를 하루빨리 씻고 완전히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는 열망으로 주검들을 파묻어버린, 은밀하고 집단적인 죄의 결사라고 폭로한다. 무참한 폭격전은 가해국으로서 독일의 미묘한 처지 등과 맞물려 적절히 애도되지 못한 채 침묵 속에 잊혀졌다. ‘애도할 줄 모르는 무능력’ 상태. 이것이 화려한 경제 기적에 가려진 독일의 병든 속내라고 그는 비판한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사라진 것은 계속해서 사라져 있다. 파괴를 덮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재건이다. 새로운 건물을 짓고, 기념물을 세워 올리고, 깨끗하게 세척된 낯을 만들어두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영문을 모르고 표백된 거리를 걸으며 희망찬 미래를 향해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과연 그런가?

한국이라는 나라는 폐허 위에 지어 올려진 재건의 서사로 굴러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겪은 노년의 인물들은 대부분 일본은 미워해도 독일에 대해서는 막연한 호감을 갖고 있었다. 이 ‘라인강의 기적’이 그들에게 어떤 종류의 동질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독일인들은 근면성실하다, 검소하다, 튼튼한 생산품을 만들어 수출한다, 과거의 커다란 역사적 상처에도 흔들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경제대국이다, 하는 말들. 그 모든 말들은 정확히 이 나라의 1960~70년대를 가리키고 있었다. ‘향수’라는 말로 뭉뚱그릴 수 없는, 그들의 몸을 채우고 있는 내면의 실조직이 물큰히 연결되어 있는 곳. 병든 속내야 병든 사람은 알 수 없다.

나는 이런 종류의 ‘삭제 기법’이 여전히 지금 이 나라에서 일어나는 모든 경악할 만한 일들과 맞닿아 있다고 느낀다. 덮고 덮으며 앞으로 나아가기. 거리낌 없이 파괴되고 다시 생성되는 재개발 현장의 숨가쁜 사이클, 실적 앞에 무력한 노동자들의 죽음, 떼쓰기로 폐기되어버린 세월호 유족들의 호소….

역사책을 표백하려는 낡은 시도

역사책을 하나의 서사로 표백하려는 시도 역시 병든 한 권력자의 개인적 제의일 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방아쇠를 당겼고 특유의 낙후하고 폐쇄적인 방식으로 일을 진행했을 뿐이다. ‘자학사관’과 ‘패배주의’라는 폭력적인 말로 미래지향을 강요하고, 사라진 자리를 뒤돌아보는 것을 용인하지 않는 곳에서 그런 시도는 언제든 일어난다.

파괴와 재건 중 하나를 기억해야 한다면 그것은 명백히 파괴일 것이다. 파괴를 기억하고 자신의 방식으로 역사를 써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응원한다.

이로사 현대도시생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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