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알고 싶지 않다’는 인간과 ‘그래도 알고 싶다’는 인간이 있다. 알면 불편할 뿐 달라지는 것은 없다며 다수가 회피할 때, 자신이 후자에 속한 사람임을 끊임없이 상기했던 인물이 있다. ‘무지할 자유’는 자유를 앞세운 회피라고 그는 썼다.
“‘우린 아무것도 몰랐다’고 말하는 국민은 스스로 훨씬 더 자유롭다고 믿었을 때 훨씬 더 자유롭지 못했다.” 유대인 강제수용소의 존재를 몰랐던 독일 국민이나 파괴된 베트남의 폐허에 무심했던 미국 국민은 ‘무지가 준 자유’에 갇혀 있었다.
그, 가토 슈이치(1919~2008). 그의 자서전 가 한국어 판본으로 출간됐다(글항아리 펴냄). 서경식 일본 도쿄경제대 교수가 번역되길 고대했던 책이다. ‘전쟁을 막는 교양의 힘’을 말할 때마다 서경식은 가토 슈이치와 이 책을 언급했다.
가토 슈이치는 전후 일본을 대표하는 참여 지식인이다. 그는 의사였고 뇌과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일본 패전 뒤 미·일 원자폭탄영향합동조사단에 참여해 피해 실태를 파악했다. 그의 문학은 ‘숨 쉴 틈’을 찾아 발원했다. 군국을 꿈꾸는 일본에 태어나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읽으며 시대의 가치를 의심했다. 의사 일을 접고 전업작가가 된 그에게 반전(反戰)은 문학과 함께 필생의 업이었다.
그는 평생 ‘국민’이 아닌 ‘인간’으로 남기 위해 고투했다. “비탈길 아래로 굴러 내려가기 시작한 자동차처럼 끝도 없이 미쳐 돌아가는 사회”에 그는 살았다. ‘국민정신총화’를 내걸고 육박해오는 전시체제 일본을 고통스러워하며 가토 슈이치는 ‘국민 거부자’의 자의식으로 를 빼곡히 채웠다. 애국적 신념과 ‘필승 정신’으로 무장하길 강요하는 “신내림적 사상”과 그는 죽을 때까지 불화했다. 그는 ‘일본인’이 아니라 “아웃사이더”이거나 “여행자” 혹은 “이방인”으로 자신을 규정했다. 일본과의 합일을 거부한 단독자로서의 열망이 그의 문장 위로 뾰족하게 돋아났다.
그는 진심으로 일본의 패전을 염원했다. 1945년 8월15일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자 그의 세계는 “밝은 빛으로 가득 찼”고 “모든 것이 기쁨으로 넘쳤”다. 그날 비로소 “살기 시작할 것”이라고 그는 기록했다. “나에게 불타버린 흔적은 단순히 도쿄의 건물이 불타버린 흔적이 아니라 도쿄의 모든 거짓말과 속임수, 시대착오와 과대망상이 불타버린 흔적이기도 했다. …설령 불타버린 흔적일지라도 진실은 거짓말로 만들어진 궁전보다 더 아름다울 것이다.”
젊은 시절 가토 슈이치는 ‘열렬한 전위’가 아니었다. 횃불 든 거리의 전사로 살지도 않았다. 그는 인생 절반을 일본을 떠나 외국에서 공부하고 가르쳤다. 그는 다만 자신의 자리를 버리지 않았다. 한때 뜨겁게 언어를 휘두르던 사람들이 어느새 자신들이 비판하던 그 사람으로 살고 있어도, 노년의 가토 슈이치는 뽑히지 않는 둥치로서 그 자리에 있었다. 오에 겐자부로와 쓰루미 스케 등과 ‘9조 모임’을 만든 그는 평화헌법 수호에 생의 마지막을 바쳤다.
서경식은 를 ‘자신이 고른 고전’의 책장에 꽂았다. 한국판 출간 소식에 그는 “한국의 독자가 가토 슈이치를 어떻게 읽을지 꼭 알고 싶다”고 했다. 정권이 국정교과서를 부활시켜 역사관 통일을 꾀하고, 전 국민 태극기 달기로 국가관을 강요하며, 남북 대결을 이용해 지지 기반을 다진다. ‘국민 만들기’란 붉은 욕망이 시퍼렇게 되살아난 시절, 한국인은 가토 슈이치를 읽을 이유가 있다. 1966~67년 신문에 두 차례 연재한 글(1960년까지 이야기)에 1999년 쓴 글(1960년 이후 30년 이야기)을 더했다. 가시를 품은 문장일수록 아름답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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