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 제 제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몇 년을 사이좋은 선후배로 지낸 남자애가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 내가 결혼해서 아들을 낳는다면 딱 요렇게 크면 좋겠다 싶은 예의 바르고 깍듯한 후배다. “글쎄,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기로 해. 그럼, 이제 선배라 안 하고 이름으로 부른다.”
누구나 한번 꿈꾸는 연하남과의 로맨스. 정말 감사하게 나에게도 있었다. 그러나 이 로맨스는 불발했다. 이미 선후배로 오래 지냈기 때문인지, 어떤 달콤한 데이트도 두근거림을 주지 못했다. 그 친구가 내 이름을 불렀던 그 첫 순간만 제외하고.
사랑하는 연인들은 곧잘 그들만의 호칭을 만든다. 대한민국 남자들이 열광하는 ‘오빠’라는 말부터 옆에서 들으면 귀를 씻어내고 싶을 정도로 닭살스러운 애칭까지. 그런 호칭들은 모두 둘만의 관계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노력이다. 하지만 지나고 보면 내가 그를 무엇이라 부르고, 그가 나를 무엇이라 불렀던가는 별로 기억나지 않는다. 남아 있는 건 그 사람의 음성을 통해 들리던 나의 이름이다. 처음으로 사귀자고 말했던 그날, 후배가 연인들이 흔히 부르는 애칭을 입 밖에 내었을 수도 있다. 가물가물하지만 이후에 그랬던 것도 같다. 하지만 뚜렷하게 남아 있는 건 내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다. 선생님, 부모님, 친구가 부르는 것과 다른 사운드로 들리는 이상한 느낌. 이름의 기능은 나를 지칭하기 위한 게 아니라, 타인이 부를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깨달음 말이다.
쉽고 재미난 곤충책을 쓰며, 영화를 통해 곤충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자 ‘곤충공포영화제’를 주최하는(아니! 두려움이 더 생기는 게 아닐까?), 메이 베렌바움의 책 에는 이름과 관련돼 이런 내용이 나온다. 유년 시절 자신은 진짜 애완동물을 키워보지 못했는데, 여기서 ‘진짜’ 애완동물이란 바로 이름을 알아듣는 생물체를 말한다. 그런 점에서 금붕어, 거북이, 도마뱀은 진짜 애완동물이라 할 수 없다. 이름이 있다 해도, 불러도 오지 않는 햄스터나 토끼 같은 동물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아마 부모님이 자신이 지각 있는 생물들을 돌볼 만한 책임감이 있는지를 의심스러워했던 것 같다고 말한다.
여기서 금붕어를 키우는 사람이 강아지를 키우는 사람보다 애정이 덜하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이름을 부르고 듣는 것이야말로 지각 행위의 가장 기본적인 것임을 다시금 알게 된다. 지각(知覺)이 뭔가. 무언가의 존재를 발견하고, 그게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알게 되는 것이지 않은가. 사랑도 그런 것이다. 그러니 이제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여인네와의 하룻밤 이야기는 연애소설이라 부르지 말자.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가슴이 뛰지 않거나,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반응하는 속도가 늦다면, 그 관계는 의심하고 되돌아보자. 말 못하는 애완동물도 애정이 무엇인지 아는데, 언어를 쓰는 사람이 그리하여야 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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