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리 되는 일이 없나.” 좌절이 밥상을 두어 번은 뒤엎고 남을 분노로 치솟던 날, 한 통의 문자메시지가 마음을 붙든다. ‘SK 김상현, 투런포로 이적 설움 달랬다.’ 시즌 초 타율 1할대였던 김상현은 기자들과 만날 때마다 “부진에서 벗어나겠다. 타율을 끌어올리겠다. 난 할 수 있다”고 말해왔다. 노력하면 안 되는 게 없다지만, 노력만으론 안 되는 게 또 야구라는 시선에 날린 통쾌한 한 방이다.
<font size="3">트레이드 충격 딛고 여유 찾은 김상현</font>
2013 프로야구는 넘어져도 일어서는 오뚝이들의 활약이 화제다. 넥센의 유한준과 허도환, 삼성의 배영섭 등 다섯 손가락이 모자란다. 2009년 기아의 통산 10번째 우승을 일궈낸 ‘CK포’도 손잡고 돌아왔다. 김상현은 2009년 홈런(36개), 타점(127개), 장타율(0.632) 1위에 시즌 최우수선수(MVP)까지 거머쥐었지만 이후 계속된 부진으로 주전 경쟁에서 밀려났다. 최희섭도 2009년 0.308이던 타율이 2011년 0.281, 2012년 0.252에 그쳤다.
그런 두 선수가 올 시즌 무서운 타자로 떠올랐다. 최희섭은 5월9일 현재 28경기에서 34안타 29타점 8홈런 타율 0.337로 좋다. 홈런 8개(3위)로 넥센 박병호(9개), SK 최정(9개)과 홈런왕 경쟁도 치열하다. 지난 4월17일 LG전을 시작으로 4월21일 SK전까지 4경기 연속 홈런포도 쏘아올렸다. 2009년 이후 4년 만에 4경기 연속 홈런이다. 팬들은 미국 프로야구 LA 다저스 시절인 2005년 6월11일 미네소타와의 3연전에서 연속 홈런을 친 순간과 비교하며 ‘빅초이’의 활약을 기대한다. 김상현은 약속대로 타율을 0.232로 끌어올렸다. 27경기 19안타 12타점 3홈런. SK로 트레이드된 5월6일 이후 첫 경기부터 홈런포를 가동했고, 두 번째 경기에서는 한국 프로야구 역대 최대 점수차(10점)로 역전승도 견인했다. “기아에 있을 땐 말 거는 기자가 없었는데 SK에 와서는 복덩이가 됐다”며 농까지 칠 정도로 여유를 되찾았다.
“내가 왕년에 말이야”로 시작하는 한물간 이들의 영웅담은 애처롭다. 두 선수의 부활은 과거의 영광에 갇혀 있지 않고 현실을 인정한, 어떤 의미에선 자존심을 내려놓은 결실이다. 김상현은 “나이가 있다는 걸 모르고 그저 밀어붙이기만 했다. 2009년은 어리고 힘도 좋았지만, 이젠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되더라”고 했다. 스스로 타격 폼에 문제가 있다고 인정하고 안 보던 미국 프로야구까지 챙겨보며 타자들의 스윙을 연구했다. 그는 지난 시즌까지 부진이 계속되면서 마음이 조급해 방망이를 성급하게 휘둘렀다. 장타력이 좋았던 시절이 떠오르는 듯 공을 너무 세게만 치려 해 타격 동작이 매끄럽지 않았다. “타격 자세를 간결한 스윙 위주로 바꿔” 재미를 보고 있는 그는 계속 공부하며 변화시킬 것이라고 한다. 최희섭도 상체 대신 하체를 이용하는 등 타격 폼을 개조했다. 2010년 4억원이던 연봉이 올해 1억5천만원으로 깎인 그는 여러 가지로 자존심에 금이 갔을 테지만 절치부심했다. “2009년처럼 잘할 수 있을까 싶어 머리도 그때처럼 길렀다”고 한다.
<font size="3">‘우승 합작’ 시나리오 물거품 됐지만</font>
자존심 강한 선수가 많은 스포츠계에서 자신을 버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정점을 찍은 경험이 있는 경우는 특히 더하다. ‘내가 누군데’ ‘예전처럼 하면 잘할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포기하기가 쉽지 않다. 두 사람이 나를 버리고 다시 시작하자 의기투합할 수 있었던 데는 서로의 존재 의미가 컸다. 둘은 2009년부터 기아에서 한솥밥을 먹었다. 최희섭은 미국을 떠나 2007년 기아에 입단해 한국 프로무대를 밟았고, 2000년 기아의 전신인 해태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한 김상현은 LG(2002~2008)를 거쳐 2009년 다시 기아로 돌아왔다. 미국 생활을 접고 한국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최희섭과, 선수로서 이름을 알리고 싶은 김상현은 기아에서 통산 10번째 우승을 일궈내며 단짝이 됐다. 김상현의 트레이드 소식에 최희섭이 올 시즌 손에 꼽을 만큼 단호하게 말한 것도 그저 괜찮다고만 하는, 단짝을 대신한 아쉬움의 표현이다. “보란 듯이 성적을 내 2년 뒤 더 많은 돈을 받고 당당하게 돌아오면 된다. 누구도 원망할 것 없다. 보여주지 못했으니 이런 일이 생긴 거다. 홈런 40개를 쳐서 갚으면 된다.”
지난해 마무리 캠프에서 둘은 “올해 반드시 우승을 차지하자”고 의기투합했다. 그 약속은 당분간 지켜지지 않겠지만, CK포의 따로 또 같은 활약은 어느 유명 자기계발서보다 값지다.
남지은 기자 한겨레 스포츠부 myviolle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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