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0년대 후반 오스트리아 빈에서 활동한 시인 페테르 알텐베르크는 빈의 카페를 예찬하며 이런 시를 남겼다. “걱정이 있거나 일이 잘 안 풀릴 때는 카페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애인이 약속을 어겼다면 카페로! 신발이 닳고 닳은 자, 카페로! 월급은 400크라운인데 지출이 500크라운이라면 카페로! 현실에선 보잘것없는 일개 노동자이지만 영예로운 장인을 꿈꾼다면 카페로! (후략)” 요컨대 휴식을 취하고 위로와 영감을 얻을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카페다.
원두 공구하고 철학 공유하는 BUS
100년이 훨씬 지났지만 카페는 여전히 비슷한 맥락에서 소용되는 듯하다. 1998년 홀리스, 이듬해 스타벅스 등 해외 프랜차이즈를 필두로 국내 카페 문화가 대중화했다.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에 따르면, 2011년 국내 커피전문점 개수는 처음으로 1만 개를 넘어 1만2381개로 집계됐다. 관세청 통계에 따르면, 2012년 커피 수입량은 10만6119t, 4조7720만6천달러어치다. 한국의 커피 소비량은 세계 30위권인데 머지않아 세계 10위권에 진입할 것으로 예측되기도 한다. 골목마다 카페가 스며든 수준이다. 경쟁이 치열해져 수준급 커피를 내리는 동네 카페도 많아졌지만, 커피 마니아들은 가끔 동네 어귀를 벗어나 커피 여행을 떠난다. 2000년대 초반 커피 장인들이 운영하는 커피전문점이 모여들어 ‘커피 해변’이라 이름붙은 강원도 강릉 안목항이 1세대 커피 메카였다면, 새로 떠오르는 커피의 도시는 부산이다.
2월26일, 부산에서 이름난 카페들을 찾았다. 부산 카페 투어의 지도는 스페셜티 커피를 다루는 카페를 중심으로 그려진다. 스페셜티 커피는 재배에서 추출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공정을 따르고 향미에 결함이 없고 산지 특성이 명확히 나타나는, 고품질의 커피를 일컫는다.
스페셜티 커피를 취급하는 부산의 카페들이 마니아 사이에서 특히 주목받는 이유는 질 좋은 커피를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부산에는 부산스페셜티커피연합 ‘BUS’가 있다. BUS는 대형 커피 프랜차이즈에 대항하려는 부산의 군소 카페 운영자들의 모임인데, 이익단체라기보다는 공정한 방식으로 거래한 질 좋은 커피를 대중화하겠다는 생각을 가진 이들의 느슨한 연대에 가깝다. BUS 회원들은 같은 철학을 가진 다른 지역의 카페들과 교류하고, 좋은 원두를 찾으려고 산지를 직접 방문하거나 경매에 참가하기도 한다. 이들은 공동구매 형식으로 스페셜티 원두를 수입하거나 중남미 지역의 고품질 커피를 일컫는 ‘컵 오브 엑셀런스’(COE·Cup Of Excellence) 원두를 낙찰받아 각 카페의 개성에 따라 커피를 구비하고 블렌딩을 내놓는다. 상업적으로 주로 거래되는 원두와 원가가 7~8배까지 차이나는 COE 커피만 제외하면 부산 지역 카페에서 맛보는 스페셜티 커피는 한 잔당 3천~5천원대로 일반 원두커피 가격과 비슷하다.
부산에는 서면 인근의 전포동, 송정 해변, 대학가인 부산대와 경성대 인근 번화가를 중심으로 프랜차이즈와 개인 카페 등이 모여 있다. 최근 몇 년 새 외국 커피 전문가들이 한국을 찾으면 이곳을 꼭 방문하고, 서울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로스터나 바리스타 등이 활발하게 찾는 거리다. 타 지역에서 카페 투어를 오는 여행객도 많다. 때때로 커피 여행객들은 매일 여러 잔의 커피를 욕심껏 들이켜다보니 “토할 때까지” 커피를 마시기도 한다.
부산에서 카페 거리가 형성되는 지역은 공통적으로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라기보다는 손님들이 커피를 목적으로 찾아오는 공간에 가깝다. 최근 가장 ‘핫’하다고 하는 전포동 일대는 번화한 홍익대·신촌을 피해 합정역 인근과 마포구 연남동에 카페가 스며들던 때와 엇비슷한 형세다. 서면 번화가에서 한 블록 건너에 위치한 전포동에는 전기·조명·공구 상가가 밀집해 있었는데, 이들 점포가 하나둘 외곽으로 빠지자 그 자리에 카페가 들어앉았다. 프랜차이즈의 격전지였던 부산대 인근은 요즘 1500원 커피 열풍이 일고 있다. 대학가라 가격 경쟁이 치열해 아메리카노 테이크아웃 한 잔 가격이 1천~2천원 선이다. 격전의 장을 배경으로, 숨은 고수들은 번화가를 벗어난 골목과 주택가에서 커피를 팔고 있었다. 해운대에서 자동차로 10여 분 거리지만 부산의 동쪽 끝에 위치해 한적했던 송정에도 카페가 하나둘 자리잡기 시작했다. 목이 좋은 해변은 역시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의 차지지만 그 뒤로 각자 개성을 살린 카페들이 땅값 비싸고 번잡한 해운대를 피해 조용히 스며드는 중이다. 3년 전 송정에 자리잡았다는 ‘인어스 커피’의 최정훈 대표는 부산이 커피도시로 떠오르는 데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제가 아는 한 부산의 카페들은 재료를 아끼지 않아요. 좋은 재료를 사려고 노력하고 이윤을 남긴다기보다는 맛있는 커피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욕심이 큰 분들도 있고요.”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가 균일한 맛을 유통하고 규모로 압도한다면 여기에 대항하는 부산의 개인 카페들은 ‘소통’의 힘에 의지한다. 부산 지역 카페 중 가장 이름이 알려진 ‘모모스’에는 바 앞에 손님들이 바리스타와 마주보고 앉을 수 있는 의자가 여러 개 놓였다. 번화가인 서면 뒷골목 고깃집들 사이에 자리한 ‘커피공장’에는 일반적으로 카페 한켠에 몰려 있는 커피 바가 매장 한가운데 놓여 있다. 이들 카페에서 커피 바는 더 이상 주문 혹은 계산대의 다른 말이 아니다. 바리스타와 고객은 바를 사이에 두고 어떤 커피를 어떤 도구로 내려 마실지, 산지와 로스팅에 따라 커피가 어떤 맛과 향을 내는지, 카페 고유의 블렌딩이 어떤 개성을 가지는지를 논했다. “원하는 바리스타에게 원하는 커피를 원하는 방식으로 내려달라고 할 수 있어요. 커피에 관한 정보를 나누며 대화하고 소통하는 과정이죠.” 커피공장 대표 김명식(36)씨의 말이다. 스페셜티 커피를 취급하는 카페들은 직거래를 통해 산지와 직접 소통하며 ‘관계’를 거래한다고 말하곤 한다.원두 구매에서 시작된 소통의 과정이 마지막 커피 한 방울이 목을 타고 넘어가며 완성되는 순간이다.
항구에선 커피 냄새가 난다
를 쓴 윌리엄 우커스는 “완벽한 커피 한 잔을 만들기 위해서는 원두가 탁월해야 할뿐더러 신선해야 한다. …로스팅 과정에서부터 커피를 잔에 따르기까지, 매 순간 정성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썼다. 좋은 재료와 정성. 부산에서 만난 로스터와 바리스타들이 입을 모아 한 말이기도 하다. 산지별로 다르다는 맛이라든지, 강배전·중배전·약배전 등 로스팅의 정도라든지 커피의 세계는 복잡다단할 것만 같았지만, 완벽한 커피를 찾아 떠난 여행의 종착지에는 가장 기본적인 두 개의 원칙이 놓여 있었다
글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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