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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난 기어들어간다, 골목으로

에세이스트 김현진의 서울 골목들… 골목은 언제나 살고자 하는 자의 편, 어디서든 골목을 찾아내면 마음이 진정되네
등록 2013-02-23 12:11 수정 2020-05-03 04:27
나의 거의 모든 역사는 골목에서 이루어졌다. 너무 호화로워 마음이 불편해지는 거리에 서면 본능적으로 골목을 찾게 된다. 한겨레 김정효 기자

나의 거의 모든 역사는 골목에서 이루어졌다. 너무 호화로워 마음이 불편해지는 거리에 서면 본능적으로 골목을 찾게 된다. 한겨레 김정효 기자

골목길에 들어설 때 말 그대로 그 안으로 기어들어가는 기분이다. 기어들어간다고밖에 표현 못할 삶의 찰나들이 있다. 술 마시고 집에 기어들어갈 때, 피곤해서 억지로 몸을 수습해 집에 기어들어갈 때, 우리는 그렇게 기어들어간다. 저마다 기어들어갈 자리가 있는데 내가 기어들어갈 자리는 언제나 골목이다. 부모를 떠나 생활하며 나의 모든 역사는 골목에서 이뤄졌다. 영화에 흔히 나오는 야경 보이는 오피스텔 같은 도회적 풍경을 꿈꿔본 적이 없다 하면 거짓이겠으나 제 생활에 드는 비용을 감당하려면 기어들어가지 않고는 곤란했다. 부동산 사람과 집주인이 입을 모아 누누이 ‘1층 같다’고 주장하는 반지하까지 기어들어가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먹고 마신 곳도 골목의 밥집과 술집, 울고 토한 곳도 모두 골목의 그늘이었으므로 그렇게 나의 거의 모든 역사는 골목에서 이뤄졌다. 좋은 것도 좋지 못한 것도 아주 많았으나 별로 친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같이 어울리게 된 친구처럼 골목과 나는 가까워졌다. 그래서 익숙하지 않은 곳, 그러니까 너무 호화로워 마음이 불편해지는 거리에 가게 되면 본능적으로 골목을 찾아 기어들어가게 된다. 어디서든 골목을 찾아낸 순간 마음이 조금 진정된다. 너무 부담되게 잘난 이성에게서 인간적인 얼굴을 발견할 때처럼, 골목은 도심의 ‘생얼’이다.

이런 것이 ‘본 투 강북 소울’인가 했더니 라는 책에 따르면 원래 한국은 골목의 나라였다. 이 책에서 최준식 교수는 집 문을 열면 바로 큰길이 나오는 미국과 달리 조그만 길, 그다음에 조금 큰 길, 그리고 큰길로 연결되는 우리 골목은 세상에 나설 때 마음의 준비를 하게 하는 구조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정자는 있어도 광장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골목을 좋아했건만 서울 북촌은 어째 불편했다. 거기 사는 선생님 말로는 이 닦다 칫솔을 떨어뜨리면 골목에 다 울린다 했다. 이미 강남에 아파트 몇 채씩 가진 이들이 세컨드하우스로 쓰는 경우가 많다니 생활의 냄새가 날 리 없다. 하긴 ‘북촌에 한옥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재력과 지위와 취향은 역세권 지역에 알짜배기 건물을 가졌네, 땅값 오를 때 막차를 탔네 하는 사람들보다 몇 수 위로 보인다.

이런 민망함은 내가 살았던 골목들이 죄다 뉴타운이 되며 브랜드 프리미엄이 붙은 건물로 변신했을 때도 와락 닥쳐온다. 서점에 갔다가 신간 코너를 들르곤 하던 옛 남자를 우연히 마주쳤는데 그가 자신도 이제 철들었다며 주가 등락과 성과급 이야기를 하느라 바쁜 걸 볼 때처럼 참담하고 시시하다. 그렇게 풀이 죽는 순간, 드라마 여주인공들은 화려한 거리로 쇼핑을 나가고 나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골목으로 기어들어간다. 언제나 골목은 살고자 하는 자의 편이므로 골목을 품은 도시는 아늑하다. 어떤 사람에게 모든 골목은 이토록 다정하다. 애잔한 것은 애잔해서 사랑스러운가, 아니면 사랑스러워서 더 애잔한가. 어쨌거나 서울의 골목들은 거리가 화려해질수록, 더욱 애잔해진다. 당신의 골목은 어디입니까.

김현진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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