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50대의 한 노동자가 있다. 파리한 얼굴에는 피로감이 딱지처럼 눌어붙어 있다. 그는 대형 조선소에서 배관 일을 한다. 배관은 사람으로 치면 혈관에 해당할 만큼 중요하지만, 그는 사내 협력업체 계약직 노동자다. 주말도 없이 하루 12시간씩 일한다. 임금은 같은 작업장에서 일하는 원청 정규직의 절반 수준이다. 정규직이 두둑한 특별상여금을 받을 때 그는 자동 연장된 고용계약서를 받는다. 이전 직장이 1997년 금융위기로 문을 닫은 이후 그의 신분은 한 번도 달라진 적이 없다. 삶은 갈수록 팍팍해졌다. 대학생 둘과 고등학생 하나를 둔 그는 1년 전 아내마저 급성 백혈병으로 잃었다.
한국의 고공농성은 ‘유비쿼터스’
지난 11월 창간한 사람 매거진 이 12월호에서 그의 개인사를 길게 다뤘다. 여기까지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전형적 삶이다. 하지만 은 그를 만나려고 여러 곳을 수소문했고, 어렵게 설득해 약속을 잡았으며, 멀리 출장도 다녀왔다. 그런데 그렇게 공을 들이고도 그의 얼굴 사진은커녕 이름조차 밝히지 않았다. 대신 3살 터울 동생의 얼굴 사진과 이름을 등장시킨다. 그의 동생은 2003년 홀로 129일 동안 고공농성을 하다 끝내 목을 매 숨졌다. 동생이 생을 마감한 곳은 지난해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309일 동안 농성했던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이다. 그곳은 ‘희망버스’의 성지였다.
그러나 남은 형에게 삶의 희망은 가뭇없어 보인다. 왜 노조를 만들지 않느냐고 묻는 기자를 물기 어린 눈으로 말똥히 바라보며, 그는 억양 없이 짧게 대답한다.
“(만들고 싶어도) 만들 수가 없어요.”
배를 짓다 9년 전 정리해고에 맞서 세상을 등진 동생을 가슴에 묻은 채, 형은 오늘도 배를 지으며 하루하루를 살아낸다. 그의 동생은 김주익 전 금속노조 한진중공업 지회장이다. 형은 익명으로밖에는 언론과 인터뷰할 수 없는 비정규직 노동자다.
은 이어 고공농성의 통사를 생생한 육성에 담아낸다. 고공농성을 하는 이들은 초인이 아니다. 그들은 바들바들 떨며 하늘을 향한다. 회사 쪽의 억압에 분통이 터져 홧김에 오른 사람, 정규직 동료에 대한 배신감에 오른 사람 등 온갖 사연이 허물없이 펼쳐진다. 잠자다 밑으로 떨어질까 불안해하고, 용변을 보다 아래를 지나는 행인과 눈이 마주쳐 어쩔 줄 몰라 했던 이야기 등 여태껏 언론에 보도된 적이 없는 사람 이야기가 풍부하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오늘 대한민국에서의 고공농성은 유비쿼터스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게이의 첫사랑과 섹시녀의 스토커짓게이와 섹시녀가 만나면 무슨 대화를 나눌까. 은 영화감독이자 제작자인 김조광수와 섹시 콘셉트의 개그우먼인 곽현화를 한자리에서 만나 길게 인터뷰했다. 이분법으로 보면 곽현화는 이성애자 여성이다. 하지만 그녀가 인식하는 자신의 고유함을 앞세우면 ‘섹시한 이성애자 여성’이다. 김조광수는 동성애자 남성이다. 곽현화식으로 하면 ‘소녀 같은 게이’다. 성 정치학적으로는 둘 다 소수자이자 약자다. 대화는 성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섹시한 이성애자 여성과 소녀 같은 게이의 성 정체성은 무척 친밀하고, 많이 닮아 보이기까지 한다. 그리고 성에 관한 두 사람의 분방한 대화는 이분법과 우승열패, 승자독식 지배하는 세상을 향한 유쾌한 독설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섹시한 이성애자 여성과 소녀 같은 게이의 만남은 그 자체로 사회적인 메시지다.
중3 때 한 소년에게 빠져든 김조광수의 첫사랑 이야기와 스무 살에 처음이자 마지막 실연을 당한 곽현화의 하룻밤 스토커 짓거리 이야기는 덤이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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