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꼼짝 말엇!’ 방문이 박살 나며 구둣발이 뛰어들었다. ‘어!’ 조원제와 또 한 사람이 숟가락을 내동댕이치며 총으로 손을 뻗치려는 순간 눈앞에 총구멍이 들이닥쳤다….”( 10권 중)
‘소년 전사’ 조원제는 빨치산이었다. 소설가 조정래의 대하소설 에 등장하는 이 인물의 실제 모델은 ‘민족경제론’으로 알려진 경제학자 고 박현채(1934~95·사진) 조선대 교수(경제학)다. 조정래는 2007년 “박 선생의 증언을 바탕으로 소설에 옮겨 놓은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책 (2009)에서 1987년 무렵 첫 만남을 이렇게 기록했다. “나 박현채라 허요. 근데, 소설 참 맛나게 잘 썼습디다. 아조 재미지게 읽었는디, 앞으로 빨치산 얘그가 본격적으로 나와야 쓸 것 같등마. 워째, 나가 그짝얼 쪼깨 아는 것이 있응께로 들어볼 맴이 있소?”
진보 경제학계의 학문적 기반
빨치산 출신, 반골 기질 가득했던 경제학자. 전남 화순 출신인 그를 설명하는 말은 다양하다. 그러나 그의 이름 석 자 앞에 가장 자주 붙는 수식어는 ‘민경’이라고 줄여 부르기도 하는 그의 책 (1978)이다. 오늘날 ‘박현채 경제학’의 주춧돌이 된 이 책은 1970년대 초·중반에 여러 매체를 통해 발표한 그의 글을 한길사가 한데 묶어낸 것이었다. 당시 대기업을 중심으로 대외 의존형 전략을 폈던 ‘박정희식 경제발전 모델’에 맞서는 이론으로 여겨졌던 ‘민족경제론’에는 소농을 보호하는 ‘농업 협업화’와 중소기업·중소자본을 민족경제의 주체로 삼는 ‘중소기업 육성론’ 등을 담고 있었다. 그의 이론은 1971년 대통령 후보로 나온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중경제론’에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개발독재와 재벌경제 구조에 맞서는 진보 성향 학계의 학문적 기반으로 여전히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한국 근현대 지성사를 언급할 때, 그의 이름이 빠지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 근현대사를 꿰뚫었던 경제학자인 그의 생을 조명한 (한겨레출판 펴냄)이 나왔다. 2006년 그의 10주기를 추모하며 그의 학문적 업적을 되짚어본 전집이 세상에 나온 적은 있었다. 그러나 박 교수가 남긴 기록과 주변 인물의 인터뷰 등으로 엮어낸 이 평전을 통해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한 경제학자의 삶과 고민을 확인할 수 있다.
책에 소개된 일화는 평탄하지 않았던 그의 삶을 여실히 보여준다. 좌익 성향의 친척들과 유년기를 보낸 그는 광주서중(현 광주일고) 3학년 때 빨치산에 가담해 돌격중대 문화부 중대장으로 활동했다. 원칙주의자였던 그의 별명은 ‘대꼬챙이’였다. 전투에서 총상을 입기도 했던 그는 빨치산 토벌 경찰에게 붙잡혔으나, 경찰서장에게 돈과 쌀을 바쳐 통사정한 부모님 덕에 풀려날 수 있었다. 그 뒤 서울대에 진학한 그는 빨치산 출신임이 알려질까봐 늘 노심초사했다. 책에서는 그가 1960년 4월 민주항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던 것도, 그의 빨치산 경력 때문이라는 해석을 내놓는다. “한 번은 서울대에 입학한 해에 화장실에서 고향 후배와 맞닥뜨렸다고 한다. 당황한 박현채는 다짜고짜 후배의 멱살을 붙잡아 화장실 안으로 끌고 들어가 문을 잠그고 자기를 보았다는 사실을 입 밖에 내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을 했다.”(71쪽)
책에서는 화려한 학문적 업적과 달리 고단한 학자였던 그의 삶도 드러난다. 대학원을 거쳐 한국농업문제연구회 연구원으로도 활동했던 그는, 26년 동안 대학 강단을 전전하는 ‘보따리 선생’으로 지냈다. 불의를 견디지 못하는 그의 강골 기질 탓이었다. 대학원 졸업 뒤 서울대 상대의 전임강사로 채용되기로 약속받았던 그는, 이를 축하하는 술자리에서 그에게 고압적으로 대하던 전임강사 선배들 앞에서 상을 엎은 뒤 일자리가 끊겼기 때문이다. 그만큼 철저하게 저항적이었던 그는 박정희 정권이 조작한 것으로 드러난 1964년 1차 ‘인민혁명당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고, 1970년대 말에는 불법 간행물을 빌려줬다는 혐의로 투옥되는 등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 때문에 그는 1989년 조선대 총장에 오른 이돈명 변호사의 추천으로 조선대 경제학과 교수로 임용되기 전까지 줄곧 ‘재야 경제평론가’라는 이름으로 살아야 했다.
그가 뿌린 씨앗, ‘경제민주화’로
지은이 김삼웅씨는 경제학자 박현채의 삶이 ‘전사이면서 학자’였다고 표현했다. “그가 서울대 재학 시절 스스로에게 붙였던 ‘민봉’(民峯)이라는 호를 달아, 그가 이룬 성과를 ‘민봉학’(民峯學)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그는 후학들에게 많은 과제를 남겼다.”(252쪽) 최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후보들마다 앞다퉈 꺼내들고 있는 ‘경제민주화’ 카드도, 어쩌면 그가 뿌려둔 고민의 씨앗이 커가고 있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책 속에 그려진 그의 삶이 2012년의 현실에서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읽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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