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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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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쓰지 않은 감독에 감사한다

모든 배우의 건투를 빌며
등록 2012-09-21 15:12 수정 2020-05-03 04:26

아이는 필요한 것들을 요구하는 거대한 현찰 흡입구가 돼 있고, 아내는 이미 돈벌이와 관계없어진 지 오래고, 캐스팅 안 되는 세월이 한 3개월만 넘어가면 속이 타들어가기 시작한다. 가장으로서 연기에만 매달린다는 것은 때로 불안의 연속이다. 그럴 때면 아는 감독이라도 찾아가서 좀 써달라고 하며 매달리고 싶어진다. 하지만 바로 그때가 배우로서 내 존재가 도약하느냐 영원히 잊히느냐 하는 기로에 선 순간이다. 선택받아야 하는 사람이 선택을 부탁하는 순간, 그 존재는 추락하기 시작한다.

연기자 중에서도 연극배우, 특히 남자 연극배우는 참 살아가기 힘들다. 대부분의 남자 연극배우는 낮에 아르바이트하고 밤에 공연하러 간다. 연기 하나에만 매달려도 될까 말까 한 판국에 낮에 다른 일에 자신의 에너지를 소비하니 실력은 늘지 않는다.

“난 아르바이트나 부업 같은 거 안 했어. 이 악물고 라면 세끼 먹으며 연극만 했지. 친구들한테는 그랬어. ‘아르바이트하면 아르바이트만 하게 된다. 난 3년 안에 연극으로 승부 볼 거다.’ 독하게 마음먹고 매달리다 보니 상도 받고 인정도 받고 계속 캐스팅이 들어오게 되더군.” 중견 배우 한명구씨의 말이다.

처음에 나는 실력을 기르기보다, 인맥을 맺으려 애썼다. 지금 돌이켜보니 인간적으로는 친했지만, 자기 작품에 나를 써주지는 않았던 감독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단지 나와 친분 관계가 있어서 캐스팅했다면 그건 나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이다.

감독은 정말 왕과도 같은 존재다. 캐스팅이란, 왕이 요직에 신하를 골라 앉히는 것과 같이 중요한 일이다. 따라서 친분 때문에, 그가 숙모의 아들이라서, 또는 자기가 어려웠을 때 도와줬기 때문에 캐스팅한다는 건 왕이 그 직분의 중요도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뭐, 시정잡배들이야 그런 짓거리를 곧잘 하지만.

순간순간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산다는 것,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나 아닌 전혀 새로운 사람의 외피를 입고 그 인물의 정신을 헤집고 들어가 골수의 핵 한가운데나 뜨거운 심장 부근에서 발견되는 순수한 한 덩어리의 영혼을 만나는 일, 그래서 문득 신 내리는 경험을 한다는 것. 그건 아마도 배우만이 가지는 특권이 아닌가 싶다.

어려운 가운데 무대에 서고 카메라 앞에 서는 모든 배우들의 건투를 빈다.

배우 겸 작가

*‘명로진의 배우가 배우에게’는 이번회를 마지막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동안 사랑해주신 독자들과 애쓰신 명로진씨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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