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는 진작에 떨어졌고, 길은 새까만 바다 같다. 버스는 깜깜한 정류장에 남루한 여행자와 묵직한 배낭을 내던진다. 잠이 덜 깬 나는, 한참 뒤에야 언덕 위의 희뿌연 불빛을 발견한다. 서서히 망막에 초점이 맞아 들어오고, 오밀조밀한 집들이 떠오른다. 마치 낯선 행성에 떨어진 것 같다. 이런 기분이 처음은 아니다. 터키의 카파도키아, 베트남의 달랏, 체코의 체스키크룸로프…. 그중에 나의 소행성을 고르라면 스페인의 모하카르였으면 한다.
그라나다에서 발렌시아로 달려가는 길. 알메리아 사막과 지중해가 만나는 곳에 작은 마을이 있다. 가파른 언덕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하얀 집들, 그 아래 푸른 바다. 마치 지중해의 섬에 닿은 듯하다. 그러나 마을 뒤로는 황량한 사막이 있다. 옥상에는 선인장, 발코니엔 야자수. 마을조차 푸에블로와 플라야라는 두 조각으로 나뉘어 있다. 쌍둥이 행성 같다.
아마 나는 월트 디즈니가 태어났다는 집에 짐을 풀 것이다. 신빙성이 희박한 전설. 어쨌든 이곳에서 미키마우스와 마주칠 우려는 없다. 동네 어디를 가든 고양이투성이다. 교회의 베고니아 화분 사이, 카페의 야외 테이블 아래, 스쿠터의 안장 위…. 침실에서 뒹굴거리던 녀석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창가의 전용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기도 한다.
나는 작은 굴다리 아래 있는 카페로 들어간다. 하몽과 크루아상에 카페 콘레체를 곁들인다. 내가 짧은 스페인어로 뭔가를 물어보면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온갖 대답을 쏟아낸다. 그러다 싸운다. 나는 밀짚모자를 얻어 쓰고 눈여겨둔 화분을 얻으러 간다. 이곳은 그 옛날 스페인 땅을 가졌던 아랍인들이 마지막으로 살았던 동네다. 마을 어디에나 코르도바의 파티오를 지중해로 옮겨놓은 듯한 작은 정원이 보석처럼 박혀 있다.
어느새 나는 마을의 가장 높은 곳, 작은 의자가 있는 버스 정류장에 닿는다. 나보다 더 까만 눈의 소년이 나무에 무언가를 매단다. 종이로 만든 사람. 그래, 동네 어디에나 있는 인달로(Indalo)라는 작은 사람 모양의 부적이다. 타일로 만들어 바닥에 깔기도 하고, 쇠로 만들어 난간을 장식하기도 한다. 선사시대부터 마을을 지켜온 상징이란다. 나는 서울에서 가져온 종이끈을 떠올린다. 그걸로 인달로를 꼬아 창가에 매달아야겠다.
긴 해가 저문다. 석양이 언덕 옆으로 숨어들면, 사람들은 선술집에 모여든다. 정체 모를 수프로 배를 적신 뒤 와인을 딴다. 한 가지도 겹치지 않는 타파스 접시들이 이어진다. 그리고 푸른 드레스 아래 빨간 힐이 문을 박차고 들어온다. “왜 아무도 플라멩코를 추지 않는 거지?” 나라도 기타를 잡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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