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그곳을 달려가고 있지만 가슴이 떨려오네.” 비트가 빨라진다. 20년 전처럼 가슴은 떨리지 않지만 대신 심장이 뛴다. 음악이 무지막지한 수준의 데시벨로 고막을 울려대고 엉덩이를 두드리는 덕분이다. 옆 테이블의 사람들은 벌써 흔들기 시작했다. 이상우의 ‘피노키오춤’이 저렇게 박자가 빠른 줄 예전엔 몰랐다. 20년 전의 심장박동 수를 만들어내는 이곳은 서울 홍익대 앞 ‘밤과 음악 사이’다.
X세대 볼륨을 높여라
음악이 ‘서태지와 아이들’의 로 바뀌자 환호가 터졌다. 서태지가 목 놓아 ‘떼창’하는 손님들을 본다면 골든벨을 울리고 싶겠다. 어차피 대화가 불가능한 데시벨이다. 하나둘 춤추기 시작했다. 밤 10시를 넘어서자 ‘밤과 음악 사이’는 디스코장으로 바뀌었다. 방금 비행을 마치고 돌아온 듯 항공사 승무원 제복을 단정히 입은 여성도, 양복에 넥타이를 맨 차림의 회사원도, 넓은 챙 모자를 눌러쓴 ‘홍대족’도 자리에서 일어나 함께 들썩인다. 패티김의 젊은 시절 사진이 걸려 있고 ‘뽀빠이 과자’가 기본 안주로 나오는 이곳은 ‘7080’을 안주 삼아 1990년대의 음악을 들이켜는 곳이다. 1층에서는 비교적 점잖은 가요를, 지하층에서는 댄스곡 위주의 가요 리믹스를 틀지만, 그래봤자 소용없다. 1층 좁은 홀에서도 손님들은 노래 를 핑계 삼아 ‘이상은 춤’을 춘다.
홍대 앞의 많은 클럽이 노땅들의 입장을 달가워하지 않는 데 비해, ‘3040 클럽’을 표방하는 ‘밤과 음악 사이’는 20대 중반부터 입장을 받는다. 술 마시고 노래방에 가던 30~40대가 돌연 이곳으로 몰렸다. 원래 서울 한남동에서 여러 해 전에 영업을 시작했지만 지난해부터 홍대점이 뜨기 시작했다. 옆 테이블에 앉은 한 손님의 말에 따르면, 여의도 증권맨들이 이곳에 몰려서란다. 광고기획자 소살리토라고 자신을 밝힌 그는 “홍익대 앞은 넥타이를 매고 올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런데 1970년대생을 위한 공간이 생기자 비싼 술을 마시던 회사원들이 이곳으로 온다”고 했다. 그와 함께 온 한 신문사 광고맨 김아무개(36)씨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옛날 생각이 나면 1990년대 학번들이 많이 가는 곳을 찾는다. 얘기하기보단 그냥 음악을 듣고 흔드는 사이 공감대가 생긴다”며 홍익대 앞에선 한국 가요를 틀어주는 가게 ‘곱창전골’도 뜨고 있다고도 귀띔했다.
‘밤과 음악 사이’의 성공에 힘입어 1990년대 음악을 내세운 가요 리믹스 클럽은 다른 곳에서도 절찬리 판매 중이다. ‘밤과 음악 사이’는 서울에만도 7곳이 넘는 가게를 냈다. 지난해 10월 서울 강남에선 복고 음악 콘셉트의 술집 ‘롤라장’이 개업했다. 이 술집은 3040 프랜차이즈를 준비 중이다. 강남에선 ‘88 젊음의 행진’을 비롯해 회사원을 노린 클럽풍 술집 여러 곳이 이미 문을 열었다. 라이브카페 창업 상담 동호회인 암스클럽 운영자 하루키는 “술집 창업을 계획했던 사람들은 3040을 타깃으로 한 가요 리믹스 클럽으로 발길을 돌리고 있다. 다음달에만 대전, 대구, 진주 세 도시에 가요 리믹스 클럽이 문을 열 것”이라고 했다. 1990년대 음악은 유흥가에서 한껏 볼륨을 키우고 있는 참이다. 하루키는 “얼핏 미사리 카페가 3040 클럽이라는 이름으로 도심에 들어오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실은 퇴보다. 이젠 음악 공연도 포기하고 리믹스된 음원만 돌고 있는, 노골적인 공연자 콘텐츠 부재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록바나 클럽 공연에서 제외된 30~40대가 즐길 거리를 찾는 것을 나무랄 수 있을까?
진짜 음악을 팔던 가게소비하는 신인류, 1970년대생은 그리 쉽게 죽지 않았다. 1990년대 중반 록카페가 뜰 때는 나이든 세대의 접근을 거부했던 그들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멤버가 연예기획사 사장으로, 강타가 심사위원으로 자리잡는 시절에 그들의 음악을 세대의 정체성으로 내세웠던 1970년대생은 다시 클럽 문턱을 밟는다. 서태지를 주류 질서의 전복자로 여겼던 1990년대 초반 학번들에게 서태지와 H.O.T를 한데 묶는 것은 부당해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서태지와 H.O.T는 ‘X세대’라 불렸던 세대의 역설적인 상징이다. 저항의 주체로 출발해 소비의 주체로 변신한 세대다. 서태지가 사라지자 그 세대 중 일부는 “더 쉽고 더 감동적인” H.O.T야말로 문화적 리더라고 외쳤다. 예나 지금이나 그들의 소비행위에는 열기가 느껴진다. 끊임없이 ‘문화 대통령’이 필요했던 것은 이들이 문화적 질서를 뒤바꾸고 싶은 욕망이 워낙 강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1960년대생이 정치를 민주화했다면, 1970년대생은 문화를 민주화했다.” 그러나 “386세대가 수행했다는 민주화도 자유화였고 그 결과 ‘자본이 요구하는 인간형…’이 되는 것이었다던 어느 연구자의 말이 맞다면 결국 우리 1970년대생은 386세대와는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열패감에 싸인 지도 이미 여러 해다. (‘시대유감, 1996년 그들이 세상을 지배했을 때’, 62호, 이재원)
북적이는 홍대 앞 거리가 힘에 부칠 시간, 자리를 옮길 때가 됐다. 새벽 1시, 홍대 앞은 절정이지만 침침해가는 서울 신촌 상권은 슬슬 문을 닫기 시작한다. 지난 2월29일 개업 21돌 파티가 열린 신촌 ‘우드스탁’ 골목은 더욱 컴컴했다. 1990년대 학번이 대중문화의 융단폭격을 맞을 즈음 그 중심에 있던 음악 카페들의 거리다. 무엇이든 소비할 자세가 돼 있던 당시 세대는 ‘진짜 음악을 파는’ 가게를 찾는 데도 열중했다. 수천 장의 LP 레코드와 대형 스피커를 갖춘 음악 카페들은 청중이 헤드뱅잉하는 라이브 공연장을 닮아 있었다. 말하자면 ‘우드스탁’은 문화적 자부심이 충만한 1990년대의 아지트였던 셈이다. 근처 병원에서 일하는 나아무개(47)씨는 ‘우드스탁’의 돌아온 단골이다. “예전에는 딴따라들이 많아서 툭하면 가게에 서서 춤도 많이 추고 그랬죠. 퇴근길에 들러 록음악 듣고 집에 갔는데 아이들이 생겨 여러 해 못 오다가 아이들이 크고 나서 다시 옵니다.” 개업 파티에 초대받은 20년 단골 남서연(40)씨는 고3 때 대학시험을 치고 이곳에 처음 왔다. “친구와 핑크플로이드의 곡을 신청했는데 디제이가 신청곡 쪽지를 보고 픽 웃으며 구겨버렸어요. 가게나 디제이에게 안 맞는 음악이면 신청곡도 무시하는 음악적 자존심이 성성했던 시절이죠.” 주변 가게들은 대부분 문을 닫거나 주인이 바뀌었다. 음악적 자존심,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자 하는 욕구는 밀려드는 홍대 상권 앞에 문을 닫았다. 남은 것은 지켜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주인인 문진웅씨는 “1990년대 가게 문을 열고 음반사와 음악인들이 음악을 듣는 사람과 이곳에서 한데 엮이던 시절이 진짜 최고였다. 주변 가게들이 모두 문을 닫아도 지금까지 스타일을 고수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때가 워낙 값졌기 때문이다. 하는 데까지 해보는 수밖에 없다”고 답했다.
“3040? 로 논다”함께 노래하는, 문화적 희망을 지저귀는, X세대를 만나보기란 여간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곳곳에서 ‘향수 산업’을 타고 돌아온 그들이 문화적 주체로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기 원하는 희망은 가득했다. 신촌의 후미진 뒷골목을 13년째 지켜온 음악 카페 ‘태’ DJ를 맡고 있는 엄민규(41)씨는 “X세대는 갈 곳이 없다”고 단언한다. 나이든 사람들도 함께하는 음악 공간이 태어날 몇 번의 기회가 있었단다. 그러나 땅값이 오르자 문화적 선수들은 다 흩어졌다. “저도 X세대를 다시 모이게 할 수 있는 방법이 궁금해요. X세대들이 곧잘 모이던 록바인 ‘중독’ ‘올드락’ 등은 아직도 남아 있지만 40대들은 힘이 달려서 못 놀아요. 예전 음악적 감흥만으로는 부족하고 뭔가 새로운 게 있어야 하는데….” 그럼 X세대는 지금 뭘 하고 놀까? “이상하죠. 정치적으로 그렇게 무관심하던 세대였는데, 요즘은 들으며 놀더라고요. 사는 게 쪼들리자 못사는 이유를 찾더라고요. 지금 그 친구들이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서 한국 정치 씹으며 놀아요.” 그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늦게까지 술자리에 동행했던 친구들은 신청곡이 끝나자 스마트폰을 두드리거나 이어폰을 낀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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