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시골 출신이라 어릴 때 만화를 주로 담 밑에서 친구들과 봤어요. 집에서 한 권씩 빼돌려서 친구들과 숨가쁘게 돌려 읽으며 ‘야 빨리 봐’ ‘그다음엔 어떻게 됐대?’ 그러면서요. 함께 만화를 볼 때의 정서적 유대감을 요즘 아이들에게도 나눠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만화가 김홍모(40)씨는 역시 만화가인 아내 임소희(35)씨와 함께 경기도 파주 헤이리의 예술인거리에 만화방을 차렸다. 그들이 차린 만화가게 ‘뜬금없이 만화방’은 만화를 돌려보고, 나눠보는 문화를 향한 공간이다.
만화방에 볕 들 날
지금 만화방은 멸종 위기를 겪고 있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만화방을 찾아 취재를 나선 11월17일, 문을 연 지 15년이 넘었다는 강남의 한 만화방은 비싼 임대료를 이기지 못하고 폐업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강남역 앞에서 6년째 ‘만화갤러리’를 운영하는 박영수(38)씨는 보통 80명씩 왔던 손님이 요즘은 40~50명도 되기 힘들다고 했다. 근처에 인테리어에 신경을 많이 쓴 만화카페가 생긴 때문이란다. 이곳은 이미 2만5천 권의 만화책을 보유하고 있지만 한 달 180만∼200만원을 새로운 책을 사들이는 데 쓴다. 경쟁이 심할수록 유지 비용은 늘어난다. 바둑 프로기사인 이창호 9단도, 강남에 사는 연예인들도 이곳의 단골이라는 게 어려운 경영을 이어나가는 주인의 자랑거리지만, 저렴하고 대중적인 소비를 지향하는 만화방이 강남에서 배겨나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1억원 가까운 인테리어 비용을 들인 비싼 만화방들은 자연스레 이용료를 올린다. 강북의 만화방들은 시간당 1천~1500원을 받지만 강남은 대부분 2천원을 받는다. 잠이 부족한 사람들이 잠시 눈 붙이고 가도 모른 척하거나, 한 권 빌리면 한 권 더 얹어주는 인심은 찾아볼 수 없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펴낸 를 보면, 만화 독자 중에서도 단행본 만화를 빌려볼 생각이 있다는 응답자가 2008년엔 72.7%였는데 2010년엔 68.1%로 4.6% 줄었다. 온라인 만화가 흥하고 동네 만화방이 하나둘 문을 닫으면서, 만화방은 대부분 ‘연인 커플’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형편이다. 연인 커플 손님이 90% 이상인 서울 신촌의 ‘꽃향기가 가득한 만화카페’는 아예 기존 만화방 이미지에서 벗어나려고 문화공간을 내걸고 위기를 헤쳐간다. 주인은 이곳을 카페에 만화책이 곁들여진 복합문화공간이라고 말한다. 푹신한 소파, 아기자기한 장식품은 물론 쥐포를 담는 그릇조차 예쁘다. 이곳뿐만 아니라 지금 남아 있는 대부분의 만화방은 흡연구역을 분리하고 컴퓨터를 설치하며 문화적인 휴게공간으로 거듭나려고 몸부림 중이다. 만화가 주인인 공간이 흥할 방법은 없을까. 생산자들이 답을 찾아나섰다.
만화방 차리는 만화쟁이들
20평 남짓한 ‘뜬금없이 만화방’을 들어서면 1980년대 만화잡지의 상징 이 눈에 들어온다. 순정·명랑·역사 등 장르도 영역도 다양해 온 가족이 사이좋게 돌려읽고 나눠읽던 그 만화책이다. 그 밖에 같은 인기 잡지에다, 만화실험지를 표방한 과 여성 만화가만 모여서 만든 까지 있다. 오래된 만화광이라면 군침을 삼킬 수밖에 없는 잡지들이다.
지난 8월 초 만화가 부부가 파주 어린이 테마파크 ‘딸기가 좋아’ 한구석에 만화방을 낸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후원이 밀려들었다. 만화가들의 모임인 ‘우리만화연대’가 1980년대 희귀 만화 400권 정도를 모조리 빌려줬다. 하민석·이지연·김성희 등의 만화가들이 소장한 만화책을 싸들고 오기도 했다. 김홍모·임소희 작가가 가지고 있던 만화책을 합치니 1천 권 넘는 책이 쌓여서 만화방이 됐다. 만화가들이 이렇게 발 벗고 나서는 것은 만화산업이 번성했던 1980년대를 그리워하는 회고 취미 때문만은 아니다. 임소희 작가는 만화방을 연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지금 만화의 주류는 웹툰이다. 웹툰 독자는 댓글을 올릴 수도 있지만, 대부분 혼자 스크롤을 내리며 읽어나간다. 즐기는 방식을 넓혀야 문화가 된다. 옆 사람과 살을 부딪히고, 종이 책장을 넘겨 냄새를 맡으며 만화를 보는 경험을 이어가기 바랐다.”
만화방은 정보에 지친 뇌가 쉬어가는 곳이다. 어린이만화 를 그린 김홍모 작가도 사람을 키우는 데는 정보보다는 넓고 큰 이야기의 힘을 믿는 쪽이라 ‘뜬금없이 만화방’에는 아예 학습만화는 들여놓지 않았다. 대신 남북 합작 그림동화나 윤승운의 , 박수동의 , 짱뚱이 시리즈 등이 어른과 아이들의 눈을 홀린다. 아이들이 뒹굴며 보라고 가게 한쪽에는 구들장도 깔았다. 처음 가게를 열 땐 종일 있어도 3천원만 받다가 이러다 가게가 망하겠구나 싶어 5천원으로 올린 지 얼마되지 않는다. 부부는 지금도 가게가 몇 평인지, 손님이 몇 명인지 정확히 모르지만, 책장이 너덜너덜해지거나 아예 반으로 쪼개진 허영만의 와 이상무의 이 얼마나 귀한 책인지는 잘 안다. 만화방 한쪽에 작업실을 차린 김홍모씨는 낮엔 만화방으로 찾아오는 손님에다 팬들까지 이래저래 작업 시간을 뺏기지만, 댓글이 아니라 얼굴을 마주 보고 소통하는 재미가 만만찮다. “단 하나 안 좋은 점은 마감 때 잠수를 탈 수 없다는 겁니다. 가게로 찾아오는 편집자들 때문에 꼼짝없이 마감을 사수하잖아요. 하하.”
만화에 푹 빠져 만화방을 차린 ‘만화쟁이’는 또 있다. 서울 홍익대 앞 만화카페 ‘한잔의 룰루랄라’ 주인 이성민(40)씨는 만화 편집일을 하다가 2008년 여름 카페 문을 열었다. 30평 정도 되는 이곳은 만화를 보는 카페이자 작업실이면서 회의 공간이다. 창가에 자리잡은 긴 바에선 만화가들이 콘티를 그리고, 테이블에서는 만화로 밥 먹고 사는 사람들이 회의도 한다. 이곳에선 가끔 만화책 출판기념회가 열리기도 한다. 만화가 좋아 단골이 된 손님들이 자연히 만화인들과 섞이는 ‘만화살롱’인 셈이다.
그보다 조금 앞선 2007년 봄에는 만화 전문 출판사 학산문화사가 운영하는 ‘코믹커즐’이 서울 상도동에 문을 열었다. 2층은 만화 전문 서점으로, 1층은 만화카페로 운영하다가 올해 초부터 1층을 따로 독립시켰다. 그래도 아직까지 카페에서는 만화책 시리즈를 1권씩 갖다 두었다. 독자층을 넓히는 취지란다. 이곳에서도 만화 애독자와 작가와 만화 관계자가 한데 섞인다.
이야기를 발견하는 곳
창작자와 독자가 만나는 공간에서 새 작품 구상이 빠질 수 없다. 만화카페에서 좋아하는 만화가와 마주치는 독자는 노골적으로 다음 작품을 주문한다. 창작 공간이 생산을 독려하기도 한다. 하민석 작가는 ‘뜬금없이 만화방’의 한쪽에서 라는 제목으로 만화방 독점 연재작을 시작했다. 김홍모 작가는 ‘뜬금없이 만화방’이 발행하는 만화잡지도 기획 중이다. 가게 한쪽에 견본 잡지를 두고 손님들의 의견을 묻는다. ‘한잔의 룰루랄라’ 만화방에 모인 창작자들이 뜻을 모아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김홍모 작가 등 만화가 6명이 함께 만든 르포 만화집 은 공동 기획·생산을 거친 작품이다. 개인 작업을 선호하던 만화가들에게는 새로운 발견이었다.
만화가들만 아이디어를 얻는 것은 아니다. 만화는 지금 가장 솜씨 있는 스토리텔러다. 지금 상영 중인 김하늘·장근석 주연의 영화 은 오가와 야요이의 만화가 원작이고, 얼마 전 개봉한 도 일본 만화를 원작으로 제작됐다. 강풀 작가의 만화는 를 비롯해 무려 5편이 영화로 제작됐다. 복합문화공간인 홍익대 앞 상상마당 지하 4층에 차려진 만화 코너에는 영화감독과 시나리오작가, 방송작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영화감독 김조광수와 가수이자 배우인 요조도 이곳의 단골 손님이란다. 영화관 옆 5평 남짓한 아늑한 공간에 준비된 만화책은 1400권 정도다. 등 영화로 익숙한 제목의 만화책들이 눈에 들어온다. 영화 관객을 위해 마련된 공간이라 영화의 원작 만화를 우선적으로 들여놓는단다. 올해 초 개봉한 의 민용근 감독은 이곳에서 ‘관객과의 대화’를 가졌다. 신인감독의 낯가림을 없애려다 보니 관객에게나 감독에게나 익숙하고 편안한 곳이 필요했나 보다.
백수가 감독 되고 감독이 백수 되는 곳이 만화방이다. 홍익대 앞에서 신촌으로 이르는 거리의 만화가게 주인들은 한결같이 단골들 중엔 작가나 PD, 감독이 많다고 말한다.
상상력을 충전하는 공간
홍익대 앞에서도 유동인구가 특히 많은 ‘걷고 싶은 거리’ 근처에도 만화방이 있다. 월 300권 이상의 신간이 꾸준히 들어온다는 한 만화방은 기억 저편의 어린 시절 만화방과 닮아 있지만 깔끔하고 쾌적하다. 근처 홍대생과 직장인이 많고, 홍익대를 방문하는 ‘자유로운 영혼’도 이곳에서 상상력을 충전하고 간다. 기타나 화구통을 메고 찾는 손님은 쉬었다 가기도, 만화책을 보며 자장면을 시켜먹고 가기도 한다. 특별활동부인 만화반에 속한 초등학생 아이들 수십 명이 선생님과 함께 와서 만화를 보고 가기도 했단다. 24시간 운영되는 곳이라 클럽에서 즐기다 첫차가 올 때까지 잠깐 시간을 보내는 청춘도 있다. 그 시간을 거치며 누구는 자라서 만화가게를 추억하기도, 누구는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기도 하리라.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안세희 인턴기자 seheea@gmail.com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미국 최고 의사’ 84살 김의신 “암에 좋은 음식 따로 없어, 그 대신…”
다 ‘내가 했다’는 명태균, 이번엔 “창원지검장 나 때문에 왔는데…”
“대통령 술친구 이긴 ‘김건희 파우치’…낙하산 사장 선임은 무효”
법원, KBS 박장범 임명 효력정지 가처분신청 기각
관저 유령건물 1년8개월 ‘감사 패싱’…“대통령실 감사방해죄 가능성”
이재명 ‘법카 유용’ 혐의도 ‘대북송금’ 재판부가 맡는다
핵탄두가 ‘주렁주렁’…푸틴이 쏜 ‘개암나무’ 신형 미사일 위력은
일상적 불심검문에 대학생·시민들 ‘불복종’…공권력 바꿨다
임영웅 ‘피케팅’ 대기 2만1578번 “선방”…‘광클 사회’ 괜찮나?
홍준표, 이재명 법카 기소에 “마이 묵었다 아이가? 그저 망신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