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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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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한 세상에 띄우는 올드팝의 살가운 위로

LP판 틀어주는 오래된 술집 ‘도어즈’의 사장 유경호씨…음악이 좋은 사람들과 더불어 행복한 DJ의 소박한 삶
등록 2011-07-29 16:07 수정 2020-05-03 04:26
» 지난 7월19일 저녁 서울 종로구 명륜동에 위치한 ‘도어즈’에서 사장 유경호씨가 음악에 대해 얘기하며 웃고 있다. 그 뒤로 1960년대 중반부터 70년 초까지 활동한 미국의 전설적 록그룹 도어즈의 리드보컬 짐 모리슨의 걸개그림이 보인다. 한겨레21 정용일

» 지난 7월19일 저녁 서울 종로구 명륜동에 위치한 ‘도어즈’에서 사장 유경호씨가 음악에 대해 얘기하며 웃고 있다. 그 뒤로 1960년대 중반부터 70년 초까지 활동한 미국의 전설적 록그룹 도어즈의 리드보컬 짐 모리슨의 걸개그림이 보인다. 한겨레21 정용일

태초에 노래가 있었다. 인류가 이 별에 등장한 이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노래는 늘 우리 곁에 있었다. 호모사피엔스는 호모무시카(Homo-musica·노래하는 인간)였다. 서울 종로구 명륜동에 자리한 LP 틀어주는 술집 ‘더 도어즈’(The Doors)는 그런 호모무시카들을 위한 안식처다. 도어즈에서 첫눈에 뜨이는 것은 세 벽면에 가득한 LP판과 CD들. 사장 유경호(47)씨는 “정확히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LP 6천여 장에 CD가 1천여 장 될 것”이라 어림잡았다. 한쪽 벽을 전부 차지한 커다란 평판 스피커와 앞쪽 스피커에선 비틀스를 비롯해 비지스, 이글스, 카펜터스, 도어즈, 김정호, 산울림, 한대수, 들국화 등 스탠더드 팝과 7080 가요가 계속 흘러나온다. 음악과 술을 좋아하는 이들에겐 딱이다 싶었다.

음악 들으며 살고 싶어 그만둔 직장

음악과 술에 대한 사랑만큼 도어즈에선 대접받기를 포기해야 한다. 도어즈에선 신청곡을 틀어주느라 분주한 사장을 대신해 손님들이 직접 술을 가져다 먹는다. 가능한 안주는 한치와 오징어, 황도뿐, 그 흔한 마른안주도 없다. 그런데도 손님들은 너나없이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다. 심지어 계산 뒤 나가며 연방 고맙다고 사장에게 머리를 숙인다. 주객전도가 따로 없다.

“제가 시킨 것도 아닌데 손님들이 알아서 술을 갖다 먹더라고요. 제가 가져다주려고 하면 이런 건 우리가 할 테니 노래나 잘 틀어달라는 거예요. 손님에게 일을 시키니 미안하죠.” 사장 유경호씨가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말했지만, 손님들은 음악만으로 족한 것처럼 보였다. 술보다 음악에 먼저 취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신청곡이 나오기라도 하면 다 큰 어른들이 어린아이처럼 발을 동동 구르며 감격해했다.

충성도 높은 손님들로 사장이 왕(?)인 도어즈는, 1995년 지금의 자리 옆 건물에서 문을 열었다. 대학 졸업 뒤 광고사진 회사에 취직한 유씨는 직장이 재미없었다. 광고주가 갑이고 광고회사가 을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승진을 해봤자 광고주에게 늘 접대하는 삶일 것이라는 생각에, 입사 5년차 되던 1995년 회사를 그만뒀다. 결혼 1주년이 안 된 신혼 때였다. 아내는 하나뿐인 인생,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라며 선선히 동의해줬다.

대학 시절 서울 신촌 독수리다방에서 몇 년간 DJ를 한 유씨는 밥벌이도 하고 좋아하는 음악도 들으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음악카페를 열기로 맘먹고 장소를 찾았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모아둔 돈 3천만원도 있었다. 마침 아는 형님이 자신의 가게를 내놓아 그 자리에 터를 잡았다. 가게 이름은 19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초까지 미국 사회를 뒤흔든 전설적인 록밴드 도어즈에서 따왔다. 스무 살 때 그들의 (When the musics over)를 처음 듣고 전율한 경험이 작용했다. “록이 이런 거구나, 처음 느꼈어요. 제게 새로운 록의 ‘문’을 열어준 밴드였죠.” ‘도어즈’의 도어가 열렸다. ‘도어즈’의 시작이었다. 밴드 도어즈가 그에게 새로운 음악의 문을 열어줬다면, 가게 도어즈는 새로운 삶의 문을 열어준 것이었다. 가게를 열자마자 손님이 밀려들었다. “그렇게까지 잘될 줄은 예상 못했는데, 손님들이 끊이지 않았어요.”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31살에 시작한 첫 사업이 승승장구하자, 무서울 것 없던 그는 창업 1년도 안 돼 서울 은평구 신사동에 도어즈 2호점을 열었다. 반드시 된다는 지인의 말만 믿고 사채를 끌어다 시작한 도어즈 2호점은 1년이 못 돼 문을 닫았다. 사기를 당한 것이다. 2호점 실패 뒤 그는 일을 좇아야 돈이 따라오지, 돈을 좇으면 돈이 달아난다는 단순한 진리를 깨달았다. “많이 못 벌어도 행복하게 살고자 시작했는데 어느덧 내가 욕심을 부리고 있었구나 싶더라고요.”

» 도어즈는 술과 안주보다 노래를 파는 술집이다. 유씨가 신청곡을 틀기 위해 LP판을 고르고 있다. 도어즈에는 6천여 장의 LP와 1천여 장의 CD가 있다. 한겨레21 정용일

» 도어즈는 술과 안주보다 노래를 파는 술집이다. 유씨가 신청곡을 틀기 위해 LP판을 고르고 있다. 도어즈에는 6천여 장의 LP와 1천여 장의 CD가 있다. 한겨레21 정용일

사운드는 강북에서 최고라 자부

사채를 갚으려고 그는 2년 동안 ‘투잡’을 뛰었다. 새벽까지 도어즈에서 일한 뒤 낮에 오토바이 퀵서비스를 한 것이다. 고되고 고된 1억원짜리 교훈의 대가였다. “제가 오토바이를 좋아해서 도어즈가 잘될 땐 할리데이비스를 사서 타기도 했는데, 그렇게 좋아한 오토바이도 퀵서비스를 하니까 신물이 나더라고요. 아, 좋아하는 것도 노동이 되면 싫은 거구나라고 느꼈죠.” 그는 그날 이후 가장 좋아한 음악만은 노동처럼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멀리서 찾아오는 손님들을 생각하면 문을 닫을 수 없어, 도어즈의 도어는 일요일과 명절 당일을 빼곤 항상 열려 있다. 음악을 아무리 좋아해도 인생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16년 동안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일을 한다는 게 쉽지는 않을 것 같았다. “주변에서 도 닦는다는 얘기도 해요. (웃음) 즐기지 않으면 못 버텼을 거예요. 또한 저를 이해해준 아내와 딸이 없었으면 그만뒀겠죠. 제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많이는 아니지만 돈도 버니 이렇게 좋은 일이 어디 있느냐 싶죠. 그래서 늘 감사하죠.” 그가 자신의 일을 즐긴다는 말이 허세는 아닌 듯싶었다. 그는 사실 자신(?)을 위해 도어즈의 스피커와 음향에 많은 돈과 정열을 쏟았다. 가게 뒤편에 있는 평판 스피커도 스피커 전문가가 직접 만든 전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그 스피커가 시가로 1억원도 더 될 것이라고 했다. 그 스피커를 들여놓으려고 LP판과 바의 위치를 반대로 바꾸는 대공사도 마다하지 않았다. 또 방송사에서나 쓰는 (원음을 잡아주는 기능의) 프리앰프와 (잡아준 원음을 그대로 내보내주는) 파워앰프(일명 진공관 램프)도 갖춰놓았다. CD 플레이어도 방송용 장비다. 하지만 사운드의 차이는 귀 밝은 손님이 아니면 잘 알지 못할 부분이다. 굳이 돈을 들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우선 제 자신을 위한 게 먼저였어요. 도어즈에 가장 오래 있는 건 저잖아요. (웃음) 제 귀에 듣기 편하고 자연스러운 사운드라면 손님들에게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죠. 방금 전에 온 손님도 오디오 전문가인데, 자기 집에서 듣는 것보다 여기가 더 좋다고 하더라고요.” 그는 사운드에 대해서만은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소리만 크면 시끄러워서 대화를 나누기 어렵잖아요. 근데 도어즈는 노래 소리가 큰 편인데도 대화하는 데 불편함이 없어요. 그게 사운드의 힘이죠. 자화자찬인 것 같지만 서울 강북에서 사운드는 도어즈가 최고라고 생각해요.” 그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도어즈의 음악 속에서 이뤄진 인터뷰가 별로 불편하지 않은 듯했다. 귀 어두운 기자가 득음(?)을 한 순간이었다.

그가 이 일을 즐기는 이유가 오로지 좋은 사운드의 음악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지난 16년은 도어즈를 사랑하고, 기꺼이 이곳을 고향이라 부르는 숱한 사람들과의 인연이 담긴 세월이기도 했다. 도어즈 곳곳은 단골들이 가져다놓은 사진, 그림, 액자, 엽서로 그득하다. 도어즈에 대한 애정의 밀도를 보여주는 증표들이다. 회사원 이창욱(36)씨는 “도어즈를 알게 된 날을 인생의 길일이라 여긴다. 힘들고 지칠 때 와서 힘 받고 가는 친정과도 같은 곳이다”라고 말했다. 고마운 단골들이다. 이런 단골들이 잘되는 모습을 보는 것도 그에겐 큰 즐거움이다.

착한 단골들과의 감사한 인연

“한번은 대기업에 다니는 단골이 아일랜드 바이어와 같이 왔는데, 아일랜드 바이어가 아일랜드 노래를 신청했어요. 틀어줬더니 감동하더라고요. 고맙다고 자신의 나라에서도 못 듣는 노래를 한국에 와서 들었다면서요. 나중에 그 단골에게 들으니 거래가 잘 성사됐다고 하더라고요. 기뻤죠. (웃음)”

» 한겨레21 정용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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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돈이) 보이는 것일까? 도어즈를 무단 도용해 해외에 ‘짝퉁’(?) 지점을 낸 사례도 있다. 자주 드나들던 캐나다 청년이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 비슷한 콘셉트로 도어즈를 개업해 대박이 난 것이다. 그는 “도어즈가 다른 나라에서도 먹히는 사업인 것 같다”며 웃었다.

도어즈는 유망사업과 더불어 청춘사업의 현장이기도 했다. “여기서 만나서 연애 뒤 결혼한 커플도 많아요. 한 커플은 여자가 노래 신청을 통해 청혼해서 남자에게 결혼 승낙을 받아내 결혼했고, 얼마 전에는 이곳에서의 인연으로 결혼한 손님 중에 한 분이 오셔서 자기 아들이 7살인데 나중에 크면 같이 올 테니 그때까지 꼭 계속해야 한다고 다짐을 받아가기도 했죠.”

매일 술 마시고 헬렐레하는 것 같아도 다들 잘되는 걸 보면서, 음악 좋아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착해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닐까 싶다는 그의 말을 들으니, “음악이 있는 곳에 악이 있을 수 없다”는 소설 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잘 풀리는 것을 보며 고맙고 다행스럽다는 그도 단골들을 보며 짠할 때가 있단다. 커플로 자주 오던 이들이 헤어진 뒤 홀로 예전 애인과 듣던 노래를 신청할 때나, 헤어진 뒤 서로 다른 애인과 왔다가 마주쳐 당황하며 모른 척할 때는 마음이 안 좋다고 했다. 도어즈는 사랑과 이별의 정류장인지도 모른다.

그는 최대한 신청곡을 많이 틀어주려 한다면서도, 중간중간에 자신이 좋아하는 곡과 들려주고 싶은 곡을 끼워넣는다고 말해 여전히 식지 않는 음악에 대한 애정을 엿보게 했다. 어떤 곡이든 누구에게나 추억이 깃들 수 있다는 점에서 소중한 음악인 까닭에 음악의 수준을 나누는 것에 동의하기 어렵다는 ‘DJ유’에게 음악이 뭐라고 생각하냐고 어리석게 물었다. “음악은 충전기라고 생각해요. 삶의 에너지를 충전해주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그는 욕심 없이 그저 오랫동안 건강하게 이 일을 하는 게 계획 아닌 계획이라고 나직하게 말했다. 이 변화무쌍한 시절에, 돌아보면 늘 그 자리에 있어주는 사람과 변치 않는 공간이 있다는 것은 분명 축복이다. 태초에 노래가 있던 것처럼, 애초에 그렇게 도어즈는 우리 곁에 있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추억과 노스탤지어를 파는 술집

도어즈는 술과 안주보다 노래를 파는 술집이다. 아니, 추억을 파는 술집인지도 모르겠다. 노래에 얽힌 기억과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의 노스탤지어를 파는 술집, 도어즈가 오래도록 그 자리에서 음악 고픈 이들을 기다리고 있으면 좋겠다. 삶이 바람 불고 쓸쓸할 때, 나도 그곳에서 콧노래를 불러야겠다. 16년째 한자리에서 지친 이들을 노래로 위로해 준 ‘DJ유’를 위해 여기 노래 한 곡을 띄운다. 그룹 아바의 (Thank you for the music).

글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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