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소설을 읽는가, 라는 물음에 어떻게 답하면 좋을까 자주 궁리한다. 누군가 멋진 대답을 해놓은 게 있으면 메모를 해두기도 한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대답은 메모의 전당에 올라간다. 솔로몬 볼코프가 엮은 쇼스타코비치 회상록 (이론과실천·2001)에 의하면 쇼스타코비치는 작가 체호프를 열광적으로 흠모했던 것 같은데 그의 말이 이렇다. “나는 체호프를 게걸스럽게 읽는다. 그의 글을 읽으면 삶의 시작과 종말에 대해 무언가 중요한 생각을 곧 만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306쪽)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를 이처럼 간결하고 정확하게 말하기도 어려울 거다.
‘삶의 시작과 종말에 대해 무언가 중요한 생각’이라는 문구에서 ‘시작’과 ‘종말’이라는 말을 폭넓게 받아들이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그것은 일단은 출생과 죽음이겠지만, 더 나아가 기쁨과 슬픔, 소유와 상실, 에로스와 타나토스, 만남과 이별 등등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이런 것들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아는데 정작 그런 것들을 가장 잘 모른다. 그러니 소설을 읽는 것이다. ‘무언가 중요한 생각’을 곧 만나게 되리라 기대하면서. 한동안 신간들을 따라 읽지 못했는데 그새 소설집이 여러 권 나왔다. 이걸 다 어쩌나. 일단 유독 끌리는 한 편씩만을, 체호프를 읽는 쇼스타코비치처럼, 게걸스럽게 읽었다.
1974년생 작가 김숨의 (문학과지성사)의 표제작에는 간암을 앓는 67살 사내가 있고 쓸개즙이 넘쳐 장기가 썩는 중인 92살의 누님이 있다. 이 소설을 읽으면, 병에 걸려 서서히 죽어가는 일이 한 존재의 의미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또 그런 이의 눈에 그를 둘러싼 인간과 세계가 어떤 방식으로 낯설어지는지 알게 된다. 아무래도 이 소설의 핵심은 바닥 모를 저수지나 귀뚜라미 시체 같은 이미지들과 사내의 마지막 울음 속에 있겠지만, 나는, 주인공 사내가 떨어진 머리카락 한 올의 무게가 천근처럼 느껴져 줍지 못했고, 수도꼭지 잠글 일이 아득하여 서너 대야의 물을 흘려보냈다, 라는 식의 무심한 디테일들에 특히 오래 머물렀다.
1976년생 작가 윤이형의 소설집 (창비)에서는 ‘결투’를 먼저 읽었다. 어떤 이유로 어떤 인간들이 두 개의 개체로 분리된다고 하자, 각각을 ‘본체’와 ‘분리체’라고 하자, 그럴 경우 어느 쪽이 본체인지 어찌 알겠는가, 그러니 둘은 목숨을 건 결투를 해야 한다, 이긴 자가 곧 본체다, 라는 식의 이야기다. 왜 분리되는가?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적 자각이 정도 이상으로 축적되면, 이라고 소설은 답한다. 여기가 핵심이다. 철거민들이 죽어나가고 동물들이 살육되는 세계에서 죄의식 없이 살려면? 첫째 아무 자각 없이 살아서 분리를 모면하거나, 둘째 분리되더라도 더 윤리적인 쪽을 죽여라. 독한 전언이다.
1974년생 작가 백영옥의 (문학동네)에서도 표제작을 읽었다. 두 권의 장편소설에서 현대인의 ‘스타일’과 ‘다이어트’를 탐구한 이 작가는, 장신구나 손잡이나 식사 예절 따위의 사소한 것들의 사회학을 시도했던 게오르크 지멜처럼, 그러나 당연히 그보다는 훨씬 더 경쾌하게, 현대성의 디테일들을 연구한다. 이번에는 영수증이다. “한 장의 영수증에는 한 인간의 소우주가 담겨 있다. (…) 술 먹은 다음날, 화장실 변기에 쏟아놓은 끈적한 토사물처럼 영수증은 우리가 토해낸 일상을 투명하게 반영한다. 몇 개의 숫자, 몇 개의 단어로. 인생이 쓸데없이 길어지는 걸 비웃는, 기이한 미니멀리즘의 세계.”
예닐곱 권의 새 소설집 중에서 우선 이 정도를 추천해드린다. 세계관과 스타일에서 사뭇 대조적인 이 세 편을 통해 자신의 취향을 점검해보셔도 좋겠다. ‘메모의 전당’ 운운하면서 말문을 열었으니 또 다른 메모로 글을 닫자. 문학 전공자들에게는 이른바 ‘신비평’의 이론가로 기억되지만 시와 소설 두 부문에서 모두 퓰리처상을 받은 유일한 저자이기도 한 로버트 펜 워런은 (1986)라는 글에서 이런 대답을 했다. “소설은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주지는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소설이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지조차 몰랐던 것들을 줄 수도 있을 거라는 사실이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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