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름은 겨울이 대목이다. 한 시즌 3대 장사 대회 가운데 추석장사대회만 빼고 연말 천하장사대회와 설날장사대회가 겨울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올겨울엔 씨름이 별로 재미를 못 봤다. 구제역 때문이다.
대한씨름협회는 지난해 12월8일부터 닷새 동안 경북 안동에서 천하장사대회를 열려고 했다. 한 해를 결산하는 큰 대회다. 그런데 대회 개막을 코앞에 둔 11월29일 하필이면 안동에서 전국 최초로 구제역이 발생했다. 대한씨름협회와 안동시는 긴 한숨을 내쉬며 대회를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아쉬웠지만 두 달여 뒤 열리는 설날장사대회를 기약할 수 있었다.
구제역으로 두 차례 취소 뒤 서울에서 열려
대한씨름협회는 다시 장소 물색에 나섰다. 이번엔 구제역과 거리가 먼 청정지역 충북 보은을 택했다. 설날 연휴 전날인 2월1일부터 나흘간 열기로 일정도 확정했다. 그런데 최근 구제역이 충주와 괴산 등 충북 지역까지 확산되면서 보은까지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씨름협회는 다시 보은군과 협의해 이마저 취소했다.
씨름이 농촌 지역을 찾아가는 이유는 두 가지다. 우선 씨름은 전통적으로 농촌에서 인기가 많기 때문에 농촌에서 대회를 열어야 사람들이 많이 몰린다. 또 대회 경비를 지방자치단체 후원으로 충당할 수 있다. 천하장사대회와 설날장사대회를 열려고 했던 경북 안동과 충북 보은에서도 씨름협회는 2억원가량의 후원금을 약속받았었다.
씨름협회는 결국 2월1일부터 4일까지 나흘간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설날장사씨름대회를 열었다. 지자체 후원금은 없지만 그렇다고 민족 최대의 명절을 씨름 없이 보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장충체육관은 1983년 제1회 천하장사대회가 열린 씨름의 메카다. 최태정 씨름협회 회장은 “서울에서 씨름대회를 여는 게 실로 몇 년 만인지 모르겠다”며 웃음지었다. 다행히 대회는 성공적이었다. 관중이 연일 체육관을 가득 메웠다.
이번 대회는 전국 17개 팀에서 4개 체급에 145명이 출전했다. 경기가 토너먼트로 열렸기 때문에 각 체급 정상에 오르려면 5~6번을 내리 이겨야 했다. 설 연휴 전날인 2월1일, 모두 40명이 출전한 태백장사전(80kg 이하)으로 막을 올렸다. 태백급은 절대 강자가 없는 체급. 선수들의 기술이 다양해 생각지도 못한 기술로 상황이 반전되는 재미가 쏠쏠하다. 결승(5전3선승제)에는 공교롭게도 2009년 6월 문경장사대회 정상에서 맞섰던 김수호(27·안산시청)와 이진형(31·울산동구청)이 재대결을 펼쳤다. 당시엔 이진형이 이겼지만 이번엔 김수호가 19개월 만에 설욕을 노렸다. 김수호는 첫판을 들배지기로 따낸 뒤 둘째 판도 들배지기를 시도하는 이진형을 덧걸이로 반격해 2-0으로 앞섰다. 셋째 판에서 들배지기를 당해 2-1로 쫓겼지만 마지막 판에서 뿌리치기로 이진형을 모래판에 누이며 19개월 만에 깨끗이 설욕했다.
2월2일 열린 금강장사전(90kg 이하)은 ‘오금당기기의 달인’ 이주용(28·수원시청)의 현역 최다인 10번째 우승이냐, ‘샛별’ 임태혁(23·수원시청)의 2연패냐로 관심이 쏠렸다. 둘은 경기대 4년 선후배로, 임태혁이 선배 이주용을 너무 좋아해 실업팀도 같은 수원시청을 택했다. 모래판 밖에선 ‘절친’이지만 둘은 공교롭게도 결승에서 맞붙었다. 공식 경기에서 맞붙기는 처음이다.이주용은 김동휘(울산동구청), 윤원철(구미시청) 등 이체급의 강자들을 차례로 물리쳤고, 대학 시절 3년 연속 왕중왕전에서 우승한 뒤 성인 무대 데뷔전이던 지난해 설날대회까지 거머쥔 임태혁 역시 한 판도 내주지 않고 결승까지 올랐다. 머리싸움은 치열했다. 이주용은 첫째 판에서 주특기인 오금당기기로 기선을 제압하려 했으나 오히려 임태혁에게 오금을 잡힌 뒤 뒤집기를 당해 0-1로 끌려갔다. 그러나 이주용은 둘째 판에서 뒤집기, 셋째 판에서 밀어치기를 성공하며 2-1로 전세를 뒤집었고, 넷째 판에서도 끊임없이 오금당기기를 시도하며 임태혁의 중심을 흔든 뒤 임태혁의 가슴 밑으로 파고들어가 멋지게 뒤집기를 성공하며 포효했다.
비디오 판독 카메라도 도입설날(2월3일) 펼쳐진 한라장사전(105kg 이하)은 ‘폭격기’ 김기태(현대삼호중공업)의 독무대였다. 김기태는 8강전부터 결승까지 일곱 판을 내리 이기면서 통산 6번째 한라장사에 올랐다. 8강에서 이광재(창원시청), 준결승에서 우형원(용인백옥쌀)을 2-0으로 완파하더니, 결승에서도 김지훈(용인백옥쌀)을 3-0으로 가볍게 물리쳤다. 김기태는 과거 이만기(48·현 인제대 교수)처럼 한라급이면서도 백두급을 넘볼 만한 진정한 ‘천하장사’ 자격을 갖춘 선수로 평가받았다.
‘씨름의 꽃’ 백두장사전(105kg 이상)은 설 연휴 마지막 날인 2월4일 펼쳐졌다. 26명이 출전한 가운데 최고의 관심은 ‘돌아온 황태자’ 이태현(35·구미시청)에게 쏠렸다. 그는 지난해 6월 문경대회에서 우승해 이만기가 보유하고 있던 통산 최다 우승(18회)을 경신하더니, 마침내 추석대회 때 사상 처음으로 통산 20번째 백두장사를 품에 안으며 포효했다. 이태현은 2006년 7월 돌연 은퇴를 선언한 뒤 종합격투기로 눈을 돌렸다가 2009년 1월 모래판에 복귀했다. 그러나 그해 10월 추석대회와 연말 천하장사대회 때 친구이자 라이벌인 ‘모래판의 귀공자’ 황규연(36·현대삼호중공업)에게 거푸 쓴잔을 마셨다. 하지만 두 노장의 라이벌전은 ‘황태자 대 귀공자’라는 별칭이 붙으며 장안의 화제를 모았다.
이태현은 결승까지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승부의 세계에선 영원한 강자도 영원한 약자도 없는 법. 이태현은 결승에서 신예 이슬기(24·현대삼호중공업)에게 무릎을 꿇으며 21번째 백두장사 등극에 실패했다.
이번 대회는 지난해부터 바뀐 개량 샅바를 사용해 샅바싸움을 못하도록 했다. 경기 진행이 빨라지고 더욱 박진감 넘치는 경기를 펼치도록 유도한 것이다. 또 판정 시비를 없애기 위해 비디오 판독 카메라를 도입했다. 텔레비전 중계 카메라와 별도로 HD급 화질의 비디오 판독용 카메라 2대를 설치해 두 선수가 거의 동시에 쓰러졌더라도 모래 위 2∼3cm에서 아슬아슬하게 승부가 가려지는 장면을 생생하게 포착했다.
“기술씨름의 부활이 곧 씨름의 부활”
씨름협회는 씨름의 인기를 만회하려면 예전처럼 기술씨름이 부활해야 한다고 본다. 획기적인 아이디어도 나왔다. 이번 대회에는 적용되지 않았지만 3월부터 160kg 체중 상한제를 도입하기로 했다. 스피드와 기술로 승부가 가려지도록 하기 위한 조처다. 현역 선수 가운데 가장 무거운 선수는 김상중(창원시청)으로 180kg이고, 윤정수도 170kg대다. 이들이 대회에 출전하려면 10∼20kg가량 체중을 줄여야 한다. 씨름협회는 또 현행 체급별 체중 상한을 5kg씩 낮추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손상주 씨름협회 전무는 “몸집이 너무 큰 선수들은 기술이나 스피드가 없어 경기가 지루하고 재미없다는 지적이 많다”며 “체중 상한을 앞으로는 140kg까지 낮출 계획도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서울에서 열린 설날장사대회가 씨름 부활의 밑거름이 될지 궁금하다.
김동훈 기자 한겨레 스포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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