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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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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그 적막하고 쓸쓸한 숲

냉정한 시선과 ‘인정머리 없는 문장’으로 들여다본 가족의 풍경과 상처,

김훈의 <내 젊은 날의 숲>
등록 2010-11-24 17:33 수정 2020-05-03 04:26

ㅅ으로 시작하는 말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말이 아마 사랑”이라면, 가장 고즈넉한 말은 ‘숲’이 아닐까 싶다. 숲을 발음하고 떠올릴 때, 우리는 이미 숲에 와 있는 것 같은 편안함을 느낀다. 또한 숲을 벗하고 살지 못하는 도시인의 착시인지는 몰라도, 숲이라는 단어는 이미 그 외형적 특징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숲의 모양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숲은 글자 자체로 이미 한 그루의 나무를 연상시킨다. 이는 비단 도시 문명에 찌든 세속인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닐 터. 헨리 데이비드 소로와 스콧 니어링에서 전우익 선생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들이 숲의 영감과 향기를 사랑했다. 숲과 유리된 삶을 사는 오늘날의 현대인과 달리, 그들은 숲에 살았고, ‘더불어 숲’이 되었다. 
푸석한 삶의 황폐함

» 김훈의 <내 젊은 날의 숲>은 ‘더불어 숲’이 되지 못하는 가족의 적막한 풍경을 그린다. 서울 근교의 숲에서 등산객이 책을 읽고 있다. 한겨레 자료

» 김훈의 <내 젊은 날의 숲>은 ‘더불어 숲’이 되지 못하는 가족의 적막한 풍경을 그린다. 서울 근교의 숲에서 등산객이 책을 읽고 있다. 한겨레 자료

그러나 소설가 김훈에게 숲은 사색과 치유의 공간임과 동시에 삶과 죽음, 생장과 소멸의 공간이다. 그는 새 장편소설 (문학동네 펴냄)에서 따로 살아서 숲을 이루는 나무들과 달리, 더불어 숲이 되지 못하는 가족의 적막하고 쓸쓸한 풍경을 그린다.

뇌물죄로 구속된 비리 공무원 아버지를 둔 조연주는 퇴직금도 없이 회사를 그만둔다. ‘마실’처럼 기독교인이 된 엄마를 뒤로하고 그녀는 홀연 비무장지대 안에 있는 국립수목원으로 떠난다. 수목원의 꽃과 나무를 그리는 계약직 세밀화가로 채용된 것이다. 그곳에서 그녀는 아내와 이혼한 뒤 자신을 쏙 빼닮은 자폐아와 단둘이 삶을 견뎌내는 연구실장 안요한을 보며, ‘채워질 수 없는 결핍’인 ‘아버지’가 자신의 가슴속에 갑자기 쳐들어옴을 느낀다. 아버지를 긍정할 수도, 그렇다고 부정할 수도 없는 그녀는 “그저 더 이상 이 세상과 부딪치거나 비비적거리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아버지의 수감이 편안했다”. 하지만 그녀의 예민한 자의식은, 아버지가 부정과 비리로 번 많은 돈이 자신의 삶에도 스며들어 있음을 서늘하게 자각시킨다. 한편 불면증을 앓는 엄마는 매일 새벽 느닷없는 전화로 딸의 삶에 불쑥불쑥 개입하고, 여기에 독립운동을 한 할아버지가 해방 이후 자식처럼 돌본 말에 대한 이야기가 겹치면서, 소설은 마치 메마른 나무 등걸처럼 윤기 없는 가족의 황폐함을 보여준다.

푸석한 그녀의 삶에 작은 물기가 되는 민통선 검문소 대장 김민수 중위와의 얕은 연애도 생의 활력이 되진 못한다. 작가는 마치 작정한 듯 사랑이나 연애와 같은 달콤한 어휘들을 생략한 채 둘의 관계를 그려나간다. 예컨대 “작약을 그리는 일보다 김민수를 그린다면 쉽고 자신 있게, 붓에 힘을 주어서 그려낼 수 있을 것”이라는 조연주의 진술이나, 재차 “제 명함 잘 넣었느냐”는 김민수의 말이 그러하다. 이는 사랑이나 희망을 말하지 않고 사랑이나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길 즐기는 저자의 스타일에서 연유하는 듯싶다.

가석방된 모범수 아버지는 출소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중풍에 몸져눕고, 엄마는 그런 아버지를 간병인에게 맡겨두고 교회에 다닌다. 3개월 만에 아버지를 들여다보러 온 딸은 아버지에게서 할아버지가 키우던 말의 냄새를 맡는다. 엄마의 꿈속에서 할아버지의 말을 타고 귀가한 아버지에게서 났다는 그 냄새. “깊은 곳이 삭아 들어가는 말기의 몸 냄새”를 풍기던 아버지는 “괜찮다”와 “미안허다” 두 마디를 남기고 얼마 못 가 숨을 거둔다.

서어나무를 세밀화로 그리며 그녀는 문득 깨닫는다. “나무들은 각자 따로 살아서 숲을 이루며, 나무에는 ‘피의 인연’이 없다는 것을. 인간에 비해 드문드문 서 있는 나무는 외롭지 않고, 다만 단독하다는 것을.”

» 김훈의 <내 젊은 날의 숲>

» 김훈의 <내 젊은 날의 숲>

결국 소설에서 숲은 한국전쟁기 국군과 인민군이 치열한 교전을 벌여 시즙이 흘러넘친 유해 발굴의 현장이고, “젊음과 늙음, 죽음과 신생이 동시에 전개”되는 생의 복판이며, 세상 밖에서 홀로 적막하되 자족하는 공간인 셈이다. 그러니 이제 알겠다. 그가 본 것은 숲이 아니라 '아버지'라는 쓸쓸한 이름이었으며, 숲이 될 수 없는 인간존재의 외로운 풍경이었음을. 그리하여 은 김훈이 자신의 아버지를 비롯해 세상을 기다시피 한 우리 시대 아버지들에게 띄우는 외로운 편지인지도 모르겠다.

소설에는 대상에 대한 냉혹하리만치 인정머리 없는 서술이나, 존재와 인식에 관한 김훈 특유의 선문답 같은 문장이 즐비하다. “7월의 폭양에 시체가 녹아서 시즙이 땅속으로 스몄다.”(21쪽) “돈이 떨어져야 보이게 되는 돈의 실체는 사실상 돈이 아닌 것이어서, 돈은 명료하면서도 난해하다. 돈은 아마도 기호이면서 실체인 것 같은데, 돈이 떨어져야만 그 명료성과 난해성을 동시에 알 수 있다.”(47쪽) “본다고 해서 보이는 것이 아니고, 본다와 보인다 사이가 그렇게 머니까 본다와 그린다 사이는 또 얼마나 아득할 것인가.”(187쪽)

단어의 한정성에 자족하나

한편, 예전 그의 다른 작품들에서 봤던 문장이 비슷하게 반복된다는 사실은 아쉬움을 남긴다. 그는 자신이 쓴 모든 문장을 기억하는 것일까. 잠든 아버지에 대한 묘사와 말 이야기 대목은 속 ‘광야를 달리는 말’(실제 소설에서도 ‘광야를 달리는 말’이라는 구절이 나온다)에서, 아버지의 병세를 묘사하는 대목은 에서, 이미 비슷하게 쓰인 바 있다. 또한 ‘~가 나에게 말해주었다’라든지, ‘~한 것이어서’로 이어지는 문장 등 자주 쓰는 익숙한 표현들도 일가를 이룬 그의 문장의 독보적 위치 때문에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그의 표현대로, 즐겨 쓰는 단어의 한정성 안에서 그가 자족하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1년 전 에서 ‘사랑’과 ‘희망’이라는 단어를 썼다는 점에서, “단 한 번도 사랑이나 희망이라는 단어를 써본 적이 없다”는 소설 속 작가의 말은 엄살 어린 농담 같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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