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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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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노동의 눈으로 본 ‘이중도시’

190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서울에 관한 320편의 노동시 모은 <서울과 노동시>
등록 2010-11-17 16:56 수정 2020-05-03 04:26

아시아의 영혼, 세계 디자인 수도, 주요 20개국(G20)정상회의가 개최되는 ‘글로벌 시티’ 서울은 그 어느 때보다 세련되고 섹시한 이름들을 별명으로 거느리고 있다. 한때 수도 이전 논란에 휩싸였던 것이 언제였느냐는 듯, ‘이명박 대통령-오세훈 시장’ 체제에서 서울은 다시 ‘특별시’가 된 것 같다.

경성의 실업자에서 서울의 이주노동자까지

» <서울과 노동시>는 서울에 대한 맹목을 경계하고, 서울을 구성하는 다양한 삶의 양상과 욕망의 풍경을 마주 보게 한다. 서울 시내에서 노동자들이 버스 중앙차로 보수 공사를 하고 있다.한겨레 자료

» <서울과 노동시>는 서울에 대한 맹목을 경계하고, 서울을 구성하는 다양한 삶의 양상과 욕망의 풍경을 마주 보게 한다. 서울 시내에서 노동자들이 버스 중앙차로 보수 공사를 하고 있다.한겨레 자료

지난 100년, 서울은 그 이름만큼이나 사연과 곡절이 많았다. ‘한성’이라 불린 서울은 국권 침탈로 ‘경성’이 된 채 36년을 보냈고, 이후 해방과 한국전쟁 등을 거치며 산업화와 자본주의의 상징도시 ‘서울’로 변모했다. 그러나 마천루가 즐비한 종로에서 몇 걸음 내달으면 공구상가와 인쇄소가 즐비한 을지로가 나오는 것처럼, 서울은 깔끔한 슈트 차림의 동안과 남루한 입성의 얼굴을 동시에 지닌 도시다. 서울이 지닌 다양한 풍경과 색깔은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빚어내는 삶의 풍경에서 비롯된다. 서울에는 청담동도 있지만, 가리봉동도 있다. 자본가의 도시이기도 한 서울은 더 많은 경우 노동자의 도시다. 서울은 전태일의 도시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가난한 이웃들의 도시다.

서울의 공간성과 노동자의 삶이 한데 어우러진 노동시를 엮은 (실천문학사 펴냄)가 나왔다. 전태일 분신 40주기(11월13일)에 맞춰 발간된 이 책은, 190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발표된 수천 편의 시 가운데 ‘서울’이라는 구체적 공간을 배경 삼아 노동자의 삶을 형상화한 시들을 시대별로 알뜰하게 골랐다. 이처럼 서울이라는 공간과 노동자·민중이라는 계급을 한 범주에 묶어, 노동시라는 틀로 조망해본 것은 드문 일이다. 책 속에는 압축성장과 근대화의 그늘에 가려 보이지 않던 지난 세기 이 땅 노동자의 고단한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 <서울과 노동시>

» <서울과 노동시>

시집은 총 세 시기로 구분돼 엮였다. 1부는 1900~50년대를 ‘식민지 수도 경성의 근대화와 노동시의 대응’이라는 관점에서 다뤘다. 본격적으로 일제의 자본주의가 조선에 이식되는 과정에서 경성의 조선인들은 소비 주체로 부상함과 동시에 반실업자로 전락했다. 경성은 ‘이중도시’였다. 노동자의 입장에서 경성의 근대화 과정은 빈곤 속에서 저임금 노동을 강요당하거나 실업 상태에 놓여야 하는 고통의 나날이었다. 이러한 이중도시 경성의 뒤안길에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을 포함한 경향파 시인들은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하고, 저임금과 빈곤, 실업에 처한 민중의 처지를 대변하는 시를 제출했다. 이른바 노동시의 전위로서 ‘프로시’(프로파간다에서 온 말로, 경향주의 계열의 시를 일컫는다)의 등장이었다. 일본 제국주의가 천황제파시즘으로 급진화하면서 혁명운동이 무너지고 노동운동이 금지되는 1934년 이후 카프는 대대적인 검거와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이듬해 해산한다. 숨죽인 세월을 보내던 정치적 시운동은 해방과 함께 다시 분출되기에 이른다. “황량하다. 천한 손 백성이 사는 이 마을엔/ 어미가 자식을 헐벗겨 떨리고/ 삽살개 사람을 물어 흔들고/ 금전과 바꾸어진 딸자식을 잊으라 애썼다./ 일장기가 태극기로 변했어도/ 그것은 지친 그들에게 ‘만세’ 소리로 높이낼 부담밖에/ 설익은 빵덩이 하나 던저주지 못했다. (중략) 일만 하면 먹여주는 소팔자가 부럽다고/ 석이는 밤새워 울드니 이날도 역시 소가 부러운 게다./ (중략) 그들(정객)은/ 피땀을 애껴서는 안 되는, 비바람을 피해서는 안 되는/ 부지런하고 억세야만 되는 이 일은 우리 농군만이 한다”(김상동, ‘田園哀話’ 부분) 일장기가 태극기로 바뀌었으나, 민중의 고통은 여전했다. 새 나라는 오지 않았던 것이다.

2부 1960~70년대는 인류 존속과 역사 발전의 필요조건으로서 ‘노동’이 한국 현대사의 위계구조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응시했다. 이 시기의 노동시들은 “서랍 속의 불온시”(김수영)처럼 양적으로 침체기였다. 근로자라는 이름의 노동자는 산업역군이거나 공돌이·공순이였다. 그 중간이 없던 시절, 국가권력이 극우 반공 이데올로기를 땔감 삼아 사회를 위계화했을 때, 노동과 관련된 지적 담론들은 그 위계화의 과정에서 설 자리가 없었다. 노동시를 쓰고 말할 자유가 없던 그때엔, 그저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기보다” “오십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부분)하는 소시민적 내면 고백이나, “이슬비 오는 날, 길을 묻던 낯선 소년의 죄 없이 크고 맑기만 한 눈동자와 노동으로 지친 내 가슴에 내린 비”(신동엽, ‘종로5가’ 부분)와 같은 애상적인 표현만이 허락되었던 것이다.

3부는 1980년대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서울로, ‘자본과 권력에 의해 배치’된 ‘핍진한 노동 형상’을 주시했다. “가리봉 시장에 밤이 깊으면/ 가게마다 내걸어놓은 백열전등 불빛 아래/ 오가는 사람들의 상기된 얼굴마다 따스한 열기가 오른다// 긴 노동 속에 갇혀 있던/ 우리는 자유로운 새가 되어/ 이리 기웃 저리 기웃 깔깔거리고 (중략) 하루 14시간/ 손발이 퉁퉁 붓도록/ 유명 브랜드 비싼 옷을 만들어도/ 고급 오디오 조립을 해도/ 우리 몫은 없어,/ 우리 손으로 만들고도 엄두도 못 내 (중략) 앞판 시다 명지는 이번 월급 타면/ 켄터키치킨 한 접시 먹으면 소원이 없겠다 하고/ 마무리 때리는 정이는 2,800원짜리/ 이쁜 샌달 하나 보아둔 게 있다며/ 잔업 없는 날 시장 가자고 손을 꼽는다”(박노해, ‘가리봉 시장’ 부분) 이 시기 노동시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이주노동자가 서울의 노동자로 편입되는 현실을 그린 점이다. 이는 한국 사회 계층구조의 변화를 드러내는 일면이다.

138명의 시인이 쓴 도시문화사적 기록

시집은 임화-신동엽-박노해-송경동으로 이어지는 참여문학 계보의 시문학사를 넘어, 자본주의하에서 서울이라는 공간이 노동 세계와 관련해 어떻게 변화해가는지 찬찬히 들여다봄으로써, 노동이 노동자 민중의 삶에 어떤 자국을 남겼는지를 도시문화사적으로 살핀 기록이다. 시집은 서울에 대한 맹목을 경계하고, 서울을 구성하는 다양한 삶의 양상과 욕망의 풍경을 마주 보게 한다. 노동하는 삶의 현장인 서울이 물신주의와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공간이 아닌, 평화를 위한 대안적 삶의 가능성을 타진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138명의 시인은 바라는지 모르겠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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