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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뚱하게 무심하게 그은 단절선



권여선의 단편소설 ‘사랑을 믿다’에서 찾은 삶을 구원하는 도주로
등록 2010-09-29 14:28 수정 2020-05-03 04:26
〈내 정원의 붉은 열매〉권여선 소설

〈내 정원의 붉은 열매〉권여선 소설

제임스 설터의 을 읽고 쓴 글에서 이런 문장을 적었다. “단편소설은 삶을 가로지르는 미세한 파열의 선(線) 하나를 발견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814호 ‘신형철의 문학 사용법’) 이번에는 이렇게 써보려고 한다. 단편소설은 삶을 가로지르는 미세한 ‘단절의 선’ 하나를 발견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라고. 일상의 육안으로는 잘 안 보이고 소설의 형안으로만 겨우 보일 정도로 미세하다는 점에서 두 선은 비슷하고, 파열선이 뒤늦게 깨닫게 되는 비극의 선이라면 단절선은 기왕의 삶 바깥을 향하는 도주의 선이라는 점에서 두 선은 다르다. 권여선의 세 번째 소설집 (문학동네 펴냄)에 수록된 ‘사랑을 믿다’를 읽고 단절선에 대해 생각했다.

연인이 될 뻔했으나 여의치 않았던 남녀가 있다. 여자는 그 남자에게, 남자는 다른 여자에게 실연당한 뒤 3년 만에 다시 만난다. 실연당한 자들의 연대에 관한 소설인가? 그렇기도 하다. “만일 내가 우연히 그들 중 누군가가 얼마 전에 지독한 실연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하자. 나는 몇 초 전까지만 해도 같은 하늘을 이고 살기조차 싫었던 그 인간을 내 집에 데려와 술을 대접하고 같은 천장 아래 재울 수도 있다. 심지어 술 냄새를 풍기는 그 인간의 입술에 부디 슬픈 꿈일랑 꾸지 말라고 굿나잇 키스까지 해줄 용의가 있다. …내가 별난 인간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나는 실연의 유대만큼 대책 없이 축축하고 뒤끝 없이 아리따운 유대를 상상할 수 없다.”(53~54쪽)

지성적이면서도 그악스러운, 이런 권여선풍의 문장이 있다. 그러나 ‘실연의 유대’가 이 소설의 핵심은 아니다. 문제는 그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남이 해줄 수 있는 일과 내가 해야 하는 일이 있다. 예컨대 ‘희망을 훼방 놓기’(55쪽)는 남이 해줄 수 있는 일이다. 뭔가 잔뜩 어질러야 거기 공간이 있다는 걸 알게 되듯이, 누가 내 희망을 훼방 놓으면 문득 내게는 희망이 있었구나 하면서 실연을 극복하게 된다는 것. 자신의 열등한 육체를 저주하다가도 누군가로부터 주먹이 날아오면 몸을 지키기 위해 정신을 차리듯이. 그러니까 징징대는 그의 생을 한 대 툭 쳐주라는 것. 넌 네 생이 싫어? 그럼 내가 망가뜨려줄까?

여기까지가 남이 해줄 수 있는 일, 이제부터는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다. “모든 걸 잃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말이야.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면 여전히 뭔가 남아 있다는 걸 깨닫게 될 거야.”(57쪽) 예컨대? “이를테면 친척집에 심부름을 간다든가, 업무 파트너의 경조사를 챙긴다든가 하는 것들.”(58쪽) 이런 사소한 일들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나? 우리의 주인공은 두 가지 사례 중 ‘친척집에 심부름 가기’를 통해 실연을 극복한 경우인데 이게 이 소설의 몸통이다. 내용 소개는 생략하자. 저 심부름에서 중요한 것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기 때문이다. ‘업무 파트너의 경조사 챙기기’를 택한 버전의 이야기라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을 거란 뜻이다.

우리의 그녀는 큰고모님댁에 심부름을 갔다가 정작 엉뚱한 할머니들만 잔뜩 만나고 돌아온다.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계단을 다 내려왔을 때 그녀는 스스로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75쪽)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 중요하다는 것은 그녀가 어디를 가서 누구를 만나건 저런 결과만 얻으면 된다는 뜻이다. 내가 타인을 보는 곳 말고 타인이 나를 보는 곳으로 가기, 거기서 내 눈을 버리고 타인의 눈을 얻기, 그리고 마침내 그 타인의 눈으로 나를 보게 되기. 이러한 관점의 이동을 통해 그녀는 실연의 상태와 단절한다. 젊은 남녀들의 실연 얘기인 이 소설의 후반부에 갑자기 할머니들이 나와야만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설은 이런 방식으로 단절선을 긋는다. 소설에서 그 선은 늘 의식적이고 능동적이고 극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그간의 내 편견이었는데, 아닌 것 같다. 삶을 깊이 들여다보는 작가일수록 조용하고 엉뚱하고 무심하게 그 선을 그려 보여주는 것도 같다. 소설을 읽으며 그 선들을 따라가다가, 운이 좋다면, 내 삶에도 단절선이 그어질 것이다. 어떻게?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멋진 책 (이론과실천·2001)을 쓴 솔로몬 볼코프는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1번을 처음 들었던 날의 ‘단절’의 충격을 이렇게 회상한다. “나는 생애 최초로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면서 연주회장을 떠났다.” 이렇게.

신형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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