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만길 지음, 창비 펴냄, 3만원
근현대사를 연구해온 사학자가 ‘자신의 역사’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원로 사학자 강만길(77) 교수가 쓴 자서전 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강 교수는 이 책에서 학문적 개념이 아닌 자신의 체험을 통해 한국의 근현대사를 말한다. 그것은 강 교수가 평생을 바쳐 연구해온 역사와, 그 역사에 휘둘린 자신에 대한 성찰이다. 역사란 박물관에 전시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삶과 시대가 서로 부딪치고 뭉쳐지며 흘러가는 강물이라는 것을 강 교수는 자서전으로 보여준다.
“분단된 민족사회의 다른 한쪽을 적이 아닌 동족으로 생각하는 역사 인식의 소유자로서, 그리고 평화주의자로서, 냉혹한 민족 분단 시대를, 그것도 엄혹했던 군사독재 시기를 살지 않을 수 없었던 역사학 전공자는 모름지기 불행한 사람들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군사정권 시절 하지 못한 말들강 교수는 자서전 집필을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일”이라고 말했다. 그가 살아온 세상은 너무 험난해, 일기를 제대로 남길 수 없었다. 군사정권은 수없이 지식인들의 서재를 검열했다. 에는 강 교수가 쓰지 못한 일기와 하지 못한 말들이 흘러넘친다. 강 교수는 역사의 가장 원초적 형태인 ‘이야기’를 통해 지난 시절을 돌아본다.
은 일제강점기의 끝자락을 산 이야기, 국민학교 6학년 때 해방을 맞은 이야기, 중학교 5학년 때 6·25 전쟁을 당한 이야기, 대학원생으로 4·19와 5·16을 겪은 이야기, 유신독재, 서울의 봄, 해직 교수 시절, 6·15 남북 공동선언 등의 이야기로 구성돼 있다. 모든 이야기에서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이 느껴진다.
전두환 정권의 압력으로 해직 교수가 된 1980년부터 1984년까지는 강 교수의 학문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복직하자마자 그는 전공 분야를 중세사에서 근현대사로 바꿨다. 해직 기간에 세상의 변화에 일조하기 위해 근현대사를 쉽게 풀어 써서 널리 읽히자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와 를 썼다. 1984년에 간행된 두 책은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
이 두 책은 역사학자 강만길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며, 한국 근현대사 연구에 대한 두 가지 문제의식을 보여준다. 는 일제강점기의 사회주의운동을 민족해방운동의 일환으로 보았다. 분단 상황 때문에 남에서는 좌익운동을, 북에서는 우익운동을 독립운동으로 인정하지 않는 상황을 강 교수는 ‘분단 시대 역사 인식의 표본’이라고 부른다. 는 보통 4·19 혁명에서 멈추는 현대사 서술 범위를 5·16 쿠데타 이후 군사정권으로 확장했다. 탄압을 받는 한이 있어도 동시대사를 객관적으로 서술할 수 있을 때 그 시대의 역사학이 제구실을 다하는 것이라고 강 교수는 생각했다.
고문당하는 황지우를 보며 치를 떨다광주항쟁 이후 항의 성명을 작성한 혐의로 서울 성북경찰서 유치장에 갇혔던 경험도 강 교수의 인생에서 중요한 계기다. 그는 대학원생이던 황지우 시인과 같은 감방을 썼고, 옆방에는 고려대생 조성우·설훈 등이 있었다. 한 달간 유치장에 갇혀 있으면서 그는 많은 경험을 했다. 어느 날 밤중에 광주 출신 경찰 간부가 “제가 교수님이 계시는 그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라는 말을 건네고 가기도 했고, 또 어느 날은 유치장을 지키는 경찰관이 냉수라며 갖다준 소주를 마시며 그래도 살 만한 세상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일 괴로운 일은 ‘동거인’ 황지우가 매일 불려나가 심한 고문을 당하고 오는 것이었다. 동생 황광우의 소재를 말하라며 황지우를 날마다 불러내 고문하는 자들을 보며 강 교수는 치를 떨었다.
노학자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의지는 단단하다.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공동상임의장으로 6·15 남북 정상회담에 참석한 경험이나,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 날 남북역사학자협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평양에 있으면서 평양 사람들의 노무현 정권에 대한 호의적 반응을 기록한 일이 눈길을 끈다. 책의 부록으로 실린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일지’는 진상규명위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쓴 비망록이다.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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