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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의 책] 속물들의 민주주의를 의심하라



윤리적 비판으로 신자유주의 스노비즘을 극복하자고 말하는 <마음의 사회학>
등록 2010-07-03 14:54 수정 2020-05-03 04:26
〈마음의 사회학〉

〈마음의 사회학〉


김홍중 지음, 문학동네 펴냄, 2만원

타인을 누르거나 무사히 살아남았다는 것을 수치이자 슬픔으로 여겼던 감수성, 자신을 온전히 던지지 못한 시대적 죄책감과 부채의식으로 괴로워한 마음을 광범위하게 공유했던 이른바 ‘진정성의 시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본격화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도래와 함께 그 시대는 급속히 종말을 고했다.

윤리적 진정성과 도덕적 진정성 

웰빙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삶의 피상성과 천박성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몰염치와 과시적 파렴치가 판치는 승자독식, 무한경쟁, 적자생존의 유사 정글사회. 사회학자 김홍중 대구대 교수는 그의 첫 저서 에서 이런 우리 사회를 스노브(속물)들이 지배하는 가짜 민주주의 사회, 스노보크라시(snobocracy)의 사회라 부른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서 ‘부자 되세요’가 덕담이 되는 신자유주의적 스노비즘 세계로의 이런 급작스러운 집합적 심리 전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먼저 진정성이란 에토스 자체와 그 한계를 파악해야 한다. 김 교수는 라이어넬 트릴링의 ‘신실성과 진정성’ 개념을 끌어온다. 신실성은 전근대의 도덕적 가치로, 사회가 요구하는 규범적 의무와 자신이 실제로 욕망하는 것 사이에 어떤 단절이나 간극도 느끼지 못하는 태도다. 이에 비해 진정성은 개인주의적 가치를 내면화한 근대적 인간이 공동체가 요구하는 역할모델과 자신의 진정한 욕망 사이에 괴리를 발견하고 이를 주체적으로 극복해가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새로운 이상이다. 뉴레프트적 지식인들은 진정성과 반란을 동일시했다. ‘진정한 나’의 추구는 ‘진정한 사회’를 추구하는 현실정치가 결합해야 비로소 가능하며, 한국 사회에서 그 접합은 민주화와 386세대에서 최고도로 구현됐다.

김 교수에 따르면, 진정성은 두 가지로 나뉜다. 윤리적 진정성과 도덕적 진정성이 그것이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 기초한 내성적이고 사적인 윤리적 진정성과 사회와의 관계에 기초한 참여적이고 공적인 도덕적 진정성 사이에는 화해하기 어려운 간극이 있다. ‘내면의 참된 목소리’를 듣기 전엔 움직이지 않는 윤리적 진정성은 망설임이며 주저이며 때로는 실천적 무능이기도 하다. 이에 반해 공동체가 외적으로 부과하는 삶의 형식들을 통해 구현되는 도덕적 진정성은 사회가 인정하고 규정한 행위 패턴이나 감정의 방식을 추종하고 모방하면서 집합체의 지배적 가치와 이상을 절대시할 가능성이 있다. 1997년 이후 체제가 도래할 때까지 한국 사회에서 그 둘은 전반적 시대정신의 결속력 아래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했다. 그 정점에 분신으로 표출된 요절과 열사들의 탄생이 존재한다. 살아남은 것이 추악한 것으로 인지된 것은 그때다.

1997년 이후 무한경쟁 시장에서 살아남는 경제적 생존 투쟁은 치부와 강박적 노동으로 이어지고 성공지상주의, 입신출세주의, 노골적인 속물주의를 낳았으며, 상품화를 통해 인간의 삶을 육체적 조건으로 환원시키는 무차별적 건강주의로 귀결됐다. 격렬한 순수에의 열망은 그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이 무너지면서 급속하게 타락하거나 전도됐다.

사유하는 능력을 회복하라 

김 교수에 따르면, 스노브의 최대 특성은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의 결여, 아렌트가 말한 ‘순전한 무사유’다. 김 교수는 스노비즘 최대의 스펙터클을 나치 전범 아이히만의 ‘상투적인 죽음’에서 찾는다. 아이히만은 처형당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했고 회오·회심은 끝내 없었다. 놀라운 집중력으로 자신을 통제한 성찰성을 지녔던 아이히만은 바보가 아니라 영악했다. 하지만 그 성찰은 특정 지점에서 정지해 있었다. 그는 자신이 받은 명령의 원천, 그 의미를 문제 삼지 않는 도구적 성찰에 머물렀다. 성찰 자체를 성찰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를 횡행하는 스노보크라시하의 자기계발 담론들이 명령하는 도구화된 성찰성, 그 영악함도 아이히만의 그것을 닮았다. 김 교수는 의심하고 회의하고 주저하는 윤리적 비판에서 희망을 찾는다. 다만 비판의 주체 스스로 윤리적이어야 한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스노비즘 비판 자체가 또 다른 스노비즘으로 전락하는 역스노비즘에 빠질 수 있다는 경고도 빼놓지 않는다.

한승동 선임기자 한겨레 문화부문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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