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족의 삶의 질은 밥상이 좌우한다. 아침은 거르고, 점심은 식당 밥으로 해결하며, 저녁은 술안주로 대충 때우다간 싱글 생활의 위기를 맞기 십상이다. 그래도 싱글들이 어쩔 수 없이 외식에 치중하는 건 낭비가 많아서다. 싱글에게 기존 가정용 식재료는 부담이 되게 마련이다. 식빵 한 묶음, 수박 한 통을 들고 얼마나 많은 싱글들이 계산을 망설였던가. 하지만 싱글족이 새로운 소비 주체로 부상하면서 맞춤형 소포장 제품들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오래 보관하거나 남겨서 버릴 필요 없이 한 번에 모두 먹을 수 있는 1인용 식품들이 인기다. 식빵 반묶음, 고등어 반마리 등 부피와 용량을 절반으로 줄인 ‘하프’(half) 상품들이 유통업계에서 뜨고 있다.
남기지 않고 질리지 않는 소비로
서울에서 혼자 자취하는 직장인 박혜영(33)씨는 버스로 두 정거장 거리의 대형마트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장을 본다. 집 앞에도 슈퍼가 있지만 차비 들여 마트 가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슈퍼에서도 찾지 못한 저가의 소용량·소포장 제품들을 발견한 뒤 마트 방문이 늘었다. 채소나 생선 같은 신선 제품도 반토막으로 잘라 판매하니 한 끼를 깔끔하게 해결할 수 있다. 질리도록 먹을 필요도 없고, 상해서 버리는 일도 줄었다. 박씨는 “혼자 먹기 적당한 양으로 판매되는 상품들이 많아지면서 요리하는 횟수도 부쩍 늘었다”고 말했다.
싱글족의 필수품은 즉석밥인 ‘햇반’이다. 한 공기 햇반의 용량은 210g. 여자 혼자 먹기엔 많다는 지적에 따라 절반 용량으로 줄인 ‘작은 햇반’(130g)이 등장했다. 작은 햇반은 라면에 말아먹는 밥으로도 불티나게 팔렸다. 작은 햇반이 히트를 치자 CJ제일제당은 스팸과 두부에 ‘싱글’이란 단어를 붙인 소용량 제품을 출시했다. 기존 스팸이나 두부 제품 대신 한 끼 식사로 가능한 양만 담았다. 소포장 제품의 인기를 업고 소스와 재료를 따로 판매해 요리하는 즐거움도 주는 ‘DIY’ 시리즈 제품은 올해 30%나 성장했다. CJ제일제당 홍보팀 김용렬씨는 “내식 문화의 정착으로 요리를 잘 해먹지 않던 싱글족과 딩크족(자녀 없는 맞벌이 부부) 등이 소포장으로 나온 식재료들을 찾기 시작했다”며 “최근 대기업들이 소포장 제품 시장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있다”고 말했다.
상품 용량을 반으로 줄이는 하프 마케팅은 음료업계로도 이어졌다. 와인의 크기가 줄었다. 혼자 다 마시기엔 부담스러운 750ml 와인의 용량을 반으로 줄인 375ml ‘하프 와인’은 꾸준히 판매가 늘고 있다. 하프 와인은 상대방과 와인 취향이 다르거나 한 병을 다 마시기 부담스러울 때, 처음 맛보는 와인에 대한 부담이 있을 때 등 장점이 많다. 현재 국내에서 판매되는 하프 와인은 모두 10여 종. 크기가 작아지니 편의성과 휴대성이 높아졌다. 스크류 캡으로 돼 있어 오프너 없이 야외에서도 쉽게 즐길 수 있다.
술이 약한 여성이나 반주로 맥주를 찾는 이들을 위한 소용량 맥주도 등장했다. 하이트맥주는 기존의 355ml와 500ml 캔맥주에서 탈피해 250ml의 ‘하이트 미니 맥주’를 판매 중이다. 용량이 작아지면서 가격 또한 250원가량 저렴해졌다. 젊은 여성들도 많이 찾는다. 여성들은 도수 낮은 맥주보다 용량이 적은 맥주를 더 선호했다.
과자 한 봉지도 줄었다. 해태제과는 장수 히트상품인 ‘연양갱’의 용량을 줄인 ‘미니 연양갱’을 내놓고 ‘아이비’ ‘오예스’ 등도 낱개로 구매할 수 있도록 했다.
다양성은 높이고 가격은 낮춘 묶음도커피 시장은 칼로리를 반으로 줄인 상품 경쟁이 치열하다. 여성의 다이어트를 위해 나온 2분의 1 칼로리 제품이다. ‘맥심 웰빙 1/2 칼로리 커피믹스’ ‘ 테이스터스 초이스 1/2 아라비카 100 커피 믹스’ 등이 ‘맛은 그대로, 칼로리는 반으로 줄였다’는 문구로 경쟁 중이다. 소식하는 웰빙문화, 알뜰한 소비문화가 만나 1인용 식탁에 맞춘 싱글 맞춤 상품이 붐을 이룬다.
실속형 소비가 불황기의 새로운 트렌드가 되면서 ‘미니 마케팅’ 제품은 대안 소비재로 떠올랐다. 하프와 미니 마케팅은 말 그대로 각 아이템의 몸집을 줄여 소비자 만족도를 높이는 판매전략이다. 작을수록 잘 팔리니 경쟁도 치열하다. 상품을 대용량으로 묶어 낮은 가격에 판매하는 것이 특징인 대형 소매점에까지 ‘미니 바람’이 불었다. 토마토·양송이 등 신선함을 생명으로 하는 채소·과일의 경우도 필요한 만큼만 판매한다. 바나나 한 송이 대신 한 개씩 개별 포장된 제품을 고를 수도 있다. 이마트는 지난 5월에 ‘990 야채’로 대박을 터트렸다. 소비자가 자주 구입하는 감자, 양파, 마늘 등 14종을 서너가지씩 소용량으로 담아 990원 균일가에 출시한 상품이었다. 이마트의 ‘990 야채’가 뜨자 롯데마트 ‘970 야채’, 홈플러스 ‘980 야채’도 생겨 경쟁이 붙기도 했다.
출판사의 핸디북 경쟁도 뜨거웠다. 이마트는 2007년 200여 종의 베스트셀러를 핸디북으로 만들어 매장에서 판매했다. 일반 보급판 책의 절반 크기에 가격은 60%대로 낮췄다. 계산대 앞, 상품 진열대 등 자투리 공간에 놓아두자 책들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이마트 내 전체 도서 판매의 10%를 차지할 정도였다. 이마트의 핸디북이 잘 팔리자 2008년에는 출판사들이 경쟁적으로 핸디북 시리즈를 내놓았다. ‘보급판 문고본 대전’ ‘핸드 인 핸드 라이브러리’ 시즌들이 쏟아졌다. 무겁고 비쌌던 패션잡지에도 핸디북이 등장했다. 보그걸은 5900원의 잡지를 핸디북 사이즈로 만들어 4500원에 판매하고 있다. 올해도 이마트의 핸디북은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 8월에 출시된 등의 요리 서적은 10월에 2만3천 권이 판매되며 매달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신세계 홍보팀 장민진씨는 “미니 마케팅의 열풍이 식품은 물론 핸디북의 인기로도 이어지고 있다”며 “부피와 용량을 줄인 다양한 저가 상품을 선택하는 합리적인 소비자가 늘었다”고 말했다.
“1인 가구 위한 웰빙 제품도 나올 것”알뜰한 소비자들은 절약형 하프 제품의 출시에도 불을 댕겼다. 대유와인은 소비자들의 출시 요청에 따라 자사의 가장 인기 있는 칠레 와인인 에스쿠도 로호도 하프 제품으로 들여왔다. 쪼갤 수 없을 것 같은 제품도 더 쪼개졌다. 최근 이마트는 가장 작은 사이즈인 200ml 우유를 반으로 자른 제품을 출시했다. 100ml 미니 우유인 ‘엔젤우유’다. 양이 작은 아이들과 다이어트 때문에 우유를 기피했던 여성을 겨냥해 나왔다. 대유와인 구도원 대리는 “단위당 가격을 비교하면 비싸지만 저용량 제품을 찾는 이들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면서 “식품과 출판 등의 유통분야에서 출시 가능한 저용량 소포장 제품의 제한 범위를 가늠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유통업계에서는 싱글들의 삶을 분석한 맞춤형 상품 시장의 가능성이 무한하다는 입장이다.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1인 가구는 2009년 현재 342만여 가구로 전체 가구 수의 20%를 차지한다. 1995년 이후 14년 동안 두 배 이상 증가한 수치다. 한국트렌드연구소 김경훈 소장은 “경제전문가들이 싱글 시장이 커질 것이란 전망을 내놓은 지 오래지만 올해 그 싱글 시장의 규모가 명확해진 듯하다”며 “경제력을 갖춘 싱글족의 증가가 먹을거리와 문화, 주거 환경까지 영향력을 넓혀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싱글 시장이 커질수록 양적 부분에 맞춰진 미니 마케팅도 질적인 변화를 이룰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CJ제일제당 김홍렬씨는 “현재는 용량만 줄인 형태로 하프와 미니 사이즈 제품들이 팔리고 있지만 앞으로는 웰빙 수요에 맞춰 좀더 고급화된 싱글 제품들이 나오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미 대선 막 올랐다…초박빙 승패 윤곽 이르면 6일 낮 나올 수도
3번째 ‘김건희 특검법’ 국회 법사위 소위 통과
‘살얼음 대선’ 미국, 옥상 저격수·감시드론…폭력사태 대비한다
9살 손잡고 “떨어지면 편입”…대치동 그 학원 1800명 북새통
한양대 교수들 시국선언…“윤, 민생 파탄내고 전쟁위기 조장” [전문]
미국 대선 투표장 둘러싼 긴 줄…오늘 분위기는 [포토]
백종원 믿고 갔는데…“전쟁 나면 밥 이렇게 먹겠구나”
패싱 당한 한동훈 “국민 눈높이 맞는 담화 기대, 반드시 그래야”
로제 ‘아파트’ 빌보드 글로벌 2주째 1위
“대통령으로 자격 있는 거야?” 묻고 싶은 건 국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