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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병의 비극’ 조선에서 배워라

명나라의 참전에 보은한다는 ‘사대적 파병’ 지적한 계승범 교수의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
등록 2009-11-20 13:14 수정 2020-05-03 04:25

한-미 동맹은 피로 맺어진 ‘혈맹’이다. 반세기도 전에 벌어진 전쟁 때 받은 ‘은혜’를 여전히 다 갚지 못했다. 그 전쟁을 부른 냉혹한 세계질서는 20년도 전에 송두리째 무너져내렸지만, 세기가 바뀌어도 ‘고마움의 기억’은 끈질긴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래서, 다시 파병이다.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

계승범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가 ‘파병’을 화두로 조선시대 지배 엘리트의 중국 인식을 분석한 (푸른역사 펴냄·2만원)를 펴냈다. 지은이는 “(파병은) 수많은 국가 사안들 중에서도 조정의 주체적 결정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사안이며, 국익을 위한 계산기를 가장 꼼꼼하게 두드려야 하는 사안”이라며 “따라서 그 논의 과정과 최종 결정을 세밀하게 살펴보면, 조선인의 명·청 인식의 실체에 좀더 가깝게 접근할 수 있다”라고 썼다.

1392년 개국부터 1876년 강요된 개항에 이르기까지 480여 년간 명과 청은 모두 15차례 조선에 파병을 요청했다. 이를 둘러싼 조선 조정의 대응 방식은 시대에 따라 그 양태를 달리했다. 개국 초기인 15세기만 해도 조선 조정은 명이 파병을 요청하면 “국가의 실익을 매우 세심하게 저울질해” 가부를 결정했단다.

파병에 대한 세종·세조·성종의 엇갈린 태도

지은이는 “세종 때 몽골 원정을 이유로 명이 파병을 요청했을 땐 만장일치로 거절했지만, 세조 때는 역으로 만장일치로 파병을 단행했다”며 “성종 때는 찬반 논쟁이 격렬했는데, 명과의 공동 군사작전은 피하되 뒤늦게 최소의 병력을 파견해 파병의 생색만 내는 쪽으로 결론이 내려졌다”고 썼다.

15세기 조선인의 이런 인식은 중원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사대의 대상인 ‘책봉국’(왕을 ‘책봉’하는 황제의 나라)을 다섯 차례나 바꿔가며 ‘실리외교’를 했던 고려시대와 맥을 같이한다. 하지만 16세기 들어 상황이 급변했다. 파병을 요청하는 황제의 ‘칙서’가 오기도 전에 미리 파병을 기정사실화한 조선 조정은 이에 따른 국가의 손익을 저울질해보지도 않은 채 서둘러 파병을 결정했다. 지은이는 “이는 당시 중종과 신료들이 ‘대명사대’와 조선의 국익을 완전히 동일시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익을 위한 동맹’이 아닌 ‘동맹이 곧 국익’이란 인식의 전도가 이뤄진 게다.

이런 인식은 16세기 말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더욱 확대·강화됐다. 명나라가 직접 군대를 보내 참전하면서, 이른바 ‘재조지은’(再造之恩·거의 망하게 된 것을 구원해 도와준 은혜)이라는 독특한 이데올로기가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 명나라가 망해가던 무렵 거의 모든 신료들의 파병 찬성론에 맞서 외롭게 반대론을 펼쳤던 광해군 때의 네 차례 파병 논쟁은 결국 계해정변(인조반정)으로 이어졌다. 정변 직후 그 주도 세력이 반포한 ‘반정교서’에서 인목대비 폐비 대신 명나라를 배신한 것을 폐위의 제일 명분으로 꼽은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재조지은’의 눈먼 이데올로기는 끝내 ‘삼전도의 굴욕’을 불렀다. 정묘·병자 두 차례 호란을 겪으며 청의 칙서를 받게 된 조선의 엘리트들은 “정신적 충격과 이념적 공황”으로 빨려들었다.

허망한 ‘북벌론’이 휩쓸던 시대, 타도 대상인 오랑캐(청)의 지휘를 받으며 출정한 ‘나선(러시아) 정벌’이 후대에 이르러 ‘북벌의 실천적 기억’으로 윤색되는 과정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지은이는 “조선왕조에서 해외파병을 놓고 벌어진 여러 조정 논쟁들의 골자는 결국 ‘중국’을 조선에 이웃한 하나의 대국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세계에서 유일한 중화국, 곧 상국이자 천자국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이자 충돌이었다”고 지적한다.

조선의 중국은 대한민국의 미국인가

조선의 중국은 대한민국의 미국이다. 지은이는 “조선의 문화 발전과 국가 안위의 배후에 명·청이 있었듯이, 대한민국의 성장 발전 과정 또한 미국이라는 거대한 힘을 배후에 업었기에 가능했고, 또한 현재까지도 그 미국의 방어 우산 속에(질서 속에) 들어가 있음으로써 국가의 안위를 유지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니 아프간 재파병을 앞두고 묻게 된다. “미국은 대한민국에 과연 무엇인가? 이웃의 큰 대국인가, 아니면 유일한 상국인가?”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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