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현대판 노예’는 없다, 그저 노예다

노예제가 살아 있는 12개국을 둘러본 현장 보고서, <보이지 않는 사람들>
등록 2009-04-30 08:13 수정 2020-05-02 19:25

미 뉴욕 맨해튼의 42번가와 48번가 사이, 1번가와 이스트강 사이에 유엔 본부 건물인 ‘유엔 플라자’가 자리를 잡고 있다. 건물 38층에 가면 ‘S-3800’이라 적힌 특별한 방이 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집무실이다. 여정은 그곳에서 시작된다.

택시비도 안 되는 값에 얻을 수 있는 ‘물건’

<보이지 않는 사람들>

<보이지 않는 사람들>

거리로 나서 택시를 잡는다. 목적지는 뉴욕에 있는 두 공항 중 한 곳인 ‘JFK 국제공항’이다. “퀸즈버러 다리를 건너 브루클린~퀸즈 간 고속화도로를 타면 채 1시간도 걸리지 않는다”는 조언을 귀담아듣자. 별다른 짐이 없다면, 까다로운 보안검색대에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수 있다. 서둘러 검색대를 통과해 비행기에 오른다. 카리브 연안의 지독히도 가난한 나라, 미국에서 970km 떨어진 아이티의 수도 포르토프랭스가 목적지다.

정확히 3시간 뒤, 비행기는 미끄러지듯 포르토프랭스의 투생 루베르튀르 공항 활주로에 안착한다. 흑인 노예들의 신앙, 부두교식 차림으로 북을 치며 춤을 추는 이들의 환영을 받으며 입국사증에 도장을 받는다. 여정의 하반부는 ‘짐칸에 밝은 색의 덮개를 씌우고 긴 의자를 붙여 개조한 픽업트럭 탭탭’을 타는 것으로 시작된다. 아이티의 30대 부호 대부분이 별장을 갖고 있는 페티오빌을 지나 델마로 향하는 길에선 ‘파란색 헬멧’(유엔 평화유지군)과 마주칠 수 있을 게다.

델마 69번지, 당신의 목적지다. 그곳 귀퉁이에 자리한 ‘르레조 이발소’ 앞에 무리지어 서 있는 네댓 명의 남성들을 만나면 ‘거래’는 절반 이상 마무리된 게다. 흥정만 잘하면 맨해튼에서 ‘JFK 공항’으로 가는 택시비도 안 되는 값에 ‘물건’을 손에 넣을 수 있다. ‘S-3800’호 실에서 나온 지 불과 5시간, 당신은 백주대낮에 신체 건강한 남자애나 여자애를 사기 위해 협상을 벌이고 있는 게다.

(벤저민 스키너 지음, 유강은 옮김, 난장이 펴냄)를 읽어내려가다 보면 절로 한숨이 새어나온다. 책장을 넘길수록 탄식의 주기는 점점 짧아진다. 1779년 10월 흑인 노예들이 혁명으로 스스로를 해방시킨 경이적인 나라 아이티에선 21세기에도 여전히 노예들이 살고 있다. 남의 집 살이를 하는 아이들, ‘더부살이’다. 입 하나 줄이기 위해, 학교에 보내준다는 말을 믿고 부모가 자발적으로 아이들을 내맡기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2002년을 기준으로 이런 아이들이 40만 명에 이른단다. 하긴 1천만 인구의 4분의 3이 하루 2달러 미만으로 삶을 버티고 있다.

아이티의 ‘더부살이’ 40만 명

“사기나 폭력의 위협을 통해,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대가만 받아가며, 강요에 따라 일에 내몰리는 사람”을 지은이는 ‘노예’로 규정했다. 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는 이들을 찾아 5년여 동안 12개 나라를 발로 뛰며 기록했다. 아이티의 참상은 지구촌 전역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에선 젊은 여성이 중고차 한 대와 맞바꿔졌다. 수단에선 부모가 자식을 담보로 신용대부를 받는 제도가 여전했다. 인도에선 10억 인구 가운데 2억6천만 명이 1달러 미만으로 하루를 난다. 이들 상당수가 노예다. 자연스레 결론이 모아진다. ‘현대판 노예’란 없다. ‘노예나 마찬가지’인 삶이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저 ‘노예’다. 빈곤이 노예를 만든다. 노예제는 버젓이 살아 있다. 지구촌 구석구석을 돌며 독자를 몰아세운 지은이가 따지듯 묻는 것 같다. ‘인류는 존엄한가?’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