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가에서 봄·가을은 잔인한 계절이다. 개편이란 이름 아래 수많은 프로그램의 생사가 갈린다. 시청률이란 성적표가 이를 좌우한다. 성적이 우수하면 프로그램은 지속되지만, 저조한 프로그램은 시청률 사각지대로 방영 시간이 밀리거나 폐지된다. 불황이란 요소가 끼면 상황은 더 각박하다. 경비 절감, 분위기 전환 등의 이유로 ‘모든 걸 다 바꿔’를 요구받는다. ‘저비용·고효율’을 향한 허리띠 졸라매기가 더욱 강조된다.
올봄 지상파 방송 3사의 개편은 이런 면에서 꽤 충격적이었다. 20년이 넘는 장수 프로그램도, 시청자에게 믿음을 주던 프리랜서 진행자들도 버티지 못했다. 중·장년층의 사랑을 받았던 프리랜서 MC들이 ‘시청률 저조’ ‘비용 절감’을 이유로 대폭 물갈이됐다. 한국방송 을 26년간 지켰던 허참, 〈TV쇼 진품명품〉(이하 진품명품)에서 10년간 고미술품의 가치를 전해온 왕종근, SBS (이하 좋은 아침)을 10년간 꾸려온 ‘안방마님’ 정은아 등이 밀려났다. 프리랜서 MC들의 자리는 방송사 내 젊은 아나운서들이 모두 채웠다. 방송사의 간판 프로그램들과 이 프로그램들을 대표했던 진행자들의 세대교체가 이뤄지면서 진행자도, 시청자도 새로운 방송 환경에 적응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
끝인사도 못하고 ‘잘리다’“요즘은… 잠을 잘 못 자요. 살이 2kg이나 빠졌네요.”
왕종근(56)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을 진행하던 힘차고 유쾌한 목소리는 전화선 너머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비용 절감’을 이유로 10년간 진행했던 프로그램에서 하차하게 된 그는 큰 상처를 받은 듯했다. “개편 이후 방송분(4월26일)까지 녹화를 해둔 상태여서 이번 개편도 그냥 넘어갔구나 했어요. 그런데 다음 녹화 들어가기 이틀 전에야 ‘잘렸다’는 사실을 알았죠. 시청자에게 그동안 감사했다는 끝인사도 못했네요.”
1995년 3월 첫 방송을 시작한 은 지금까지 2천 점이 넘는 고미술품을 소개했다. 14년이란 시간 중 10년을 왕종근이 진행했다. 1995년부터 진행을 맡았던 그는 1999년 프리랜서를 선언하면서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2005년부터 다시 진행을 맡아왔다. “우리 프로그램은 집 안 어딘가에 고물처럼 묻혀 있는 고미술품의 가치를 알아보는 안목을 길러준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고미술품의 감정가를 알아보러 오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재밌죠. 처음엔 별거 아닌 줄 알고 아무렇게나 들고 왔다가 높은 감정가를 받으면 나중엔 신문지부터 찾아요. 꽁꽁 싸매서 가려고요. 반대로 가보인 줄 알고 조심스럽게 품에 안고 왔다 (감정가가 낮으면) 소품으로 쓰라며 방송사에 놓고 가기도 하죠.”
왕종근의 하차는 프리랜서 MC들의 위치가 얼마나 위태로운지를 말해준다. 의 연출을 맡은 김찬호 PD는 “은 진행자의 연륜이 오히려 장점이 되는 프로그램”이라며 “출연료를 줄인다는 이유로 진행자를 교체하면서 본의 아니게 왕종근씨가 공중파에서 발을 끊게 돼 제작진들도 괴로워하고 있다”고 말했다. 왕종근도 “오랜 시간 진행을 맡겨준 제작진과 방송사에 감사하다”면서도 아쉬운 마음을 숨기진 못했다. “방송 3사의 개편을 보면 프로그램을 대표하는 유명 프리랜서 MC들을 교체하면서 경비 절감을 위해 몸부림치는 상황을 전시효과처럼 보여주는 것 같다”고 했다.
문화방송 라디오 을 진행하던 김성주(37)의 하차도 같은 맥락에서 풀이된다. 김성주는 프리랜서 선언을 하기 전에 4년간 을 진행했다. 그동안 동시간대 청취율 1위를 거머쥐기도 했다. 2007년 프리랜서를 선언하며 물러났던 그는 지난가을 개편 때 1년7개월 만에 다시 DJ를 맡아 돌아왔다. 당시 그는 “예전 그 자리로 복귀해 기쁘다”며 “기다려준 청취자들이 원하는 그 이상의 방송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다시 돌아온 그를 청취자도 따뜻하게 환영했다. 그러나 김성주는 복귀 6개월 만에 물러나게 됐다. 김성주는 마저 시청률 저조로 폐지되면서 TV에서 아예 빠진 상태다. 김성주의 소속사 팬텀엔터테인먼트 쪽은 “김성주가 본의 아니게 문화방송 프로그램에서 모두 하차하게 돼 많이 힘들어하고 있다”며 안타까움을 전하기도 했다. 방송사의 한 관계자는 “김성주가 제 역할을 다 못했거나 찍혀서 뺀 게 아니라 타 프로그램의 진행자 교체처럼 내부 인력을 육성한다는 차원에서 다른 아나운서에게 기회가 간 것”이라면서도 “청취율이 떨어진 것도 아닌데 6개월 만에 하차시킨 건 설명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청취자 김광효씨는 “방송사의 변덕으로 볼 수밖에 없다”며 “김성주와 청취자를 우롱하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고향 마을의 큰 나무가 베인 듯”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대중의 취향과 트렌드를 쫓아가지 못해 단명한 프로그램들이 쏟아지는 방송 환경에서 세대를 뛰어넘는 장수 프로그램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시청률이나 공익성 면에서 프로그램을 단단하게 받쳐왔던 장수 진행자는 시청자의 오랜 벗이다. 그동안 이런 진행자를 교체한다는 것은 방송사 내에서 쉽게 생각하지 못했다.
아침 프로그램 도 그랬다. 10년간 이 프로그램을 진행해온 정은아(44)는 주부들의 신뢰가 컸다. 김승현, 이재룡 등 남자 진행자를 바꿔가면서도 그는 늘 한자리에 있었다. 개편 때마다 독보적인 존재로 흔들림이 없었는데, 경기 불황이 장기화된 올봄 개편은 그도 피해가지 못했다. 경력과 함께 높아진 그의 출연료는 방송사의 부담이 됐다. 정은아는 과 더불어 한국방송의 도 하차했다. 제작비 압박을 받아오던 프로그램이 이번 개편에서 방영 시간이 줄고 편성 시간도 옮겨가면서 정은아를 포기한 것이다. 공중파 프로그램은 이제 한국방송 만 진행한다.
의 허참(59)도 26년 만에 프로그램이 폐지되면서 시청자 곁을 떠났다. PD 31명, 여성 진행자가 21명이 바뀌는 동안 허참은 한결같았다. 그는 “한국방송 1TV 정도면 시청률과 상관없이 역사 깊은 프로그램을 가져갈 수 있을 텐데 안타깝다”며 “고향 마을의 큰 나무가 베인 것 같다”고 말했다. 남녀 성대결을 펼치는 은 부녀회나 학부모회 등 주부들의 방청 신청을 받아 진행해왔다. 허참은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주부들이 녹화할 땐 신나게 즐기고, 녹화가 끝나면 기념사진을 찍고 사인을 받아가면서 추억을 만들더라”며 “지금도 출연 요청이 끊이지 않는데 이분들의 즐거움을 뺏은 것 같아 아쉽다”고 말했다.
폐지 소식은 인터넷 시청자 게시판도 뜨겁게 달궜다. 정승호씨는 “내가 5살 때부터 했던 프로그램이다. 끝나니까 눈물이 난다. 어르신들은 물론 온 가족이 볼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없어지다니 믿어지지 않는다”고 게시판에 글을 남겼다.
방송사의 간판 프로그램, 그리고 그 프로그램을 대표했던 진행자들이 사라지면서 중·장년층의 오락물은 맛이 달라졌다. ‘묵은지’의 깊은 맛 대신 양념을 새로 한 ‘짠지’의 맛을 내게 됐다. 시청자는 옛것의 친근함과 푸근함 대신 낯섦을 경험하는 중이다.
다이어트 프로그램도 시청률 시험대에…한국방송은 이번 봄 개편에서 외부 진행자를 줄이고 출연자들이 출연료를 자진 삭감하면서 7억원의 제작비를 절감하게 됐다고 밝혔다. 실제로 강호동·유재석·남희석 등은 경영 악화에 시달리는 방송사의 고통을 분담하겠다며 10% 이상씩 출연료를 낮췄다. 한국방송 권순우 편성국장은 “장수 프로그램의 폐지에는 역사성을 지켜야 한다는 태도와 신선한 변화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는 가운데 경영 악화란 요소가 작용했다”며 “프리랜서 MC들의 경우도 내부 아나운서를 기용해 방송사 경비를 줄이자는 차원이었을 뿐 다른 의도는 없다”고 말했다.
왕종근은 “바른 말을 하는 아나운서가 맡을 자리와 웃음을 주는 개그맨 등이 맡아야 할 자리가 따로 있다”며 “그 중간에 필요한 게 검증된 프리랜서 MC의 자리인데 그 자리가 좁아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봄 개편을 맞아 다이어트에 나선 방송사들의 감량 결과는 시청률이란 냉정한 시험대에 다시 올랐다.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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