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품에 안겨 울고파
부르기만 해도 그리움과 정겨움이 묻어나는 ‘엄마’가 경기 불황의 해결사로 떴다. 연극·출판·공연 할 것 없이 삶에 지친 이들을 위로하고 응원하는 소재는 엄마다. 사람들의 마음 치유사로 나선 작가들도 엄마의 도움을 받았다. 소설가 신경숙은 여러 매체와 한 인터뷰에서 “를 쓰면서 글이 막힐 때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연극 을 쓴 고혜정 작가는 “책을 다 쓰고 글을 못 읽는 친정엄마에게 읽어드렸더니 ‘먼지만도 못한 내 인생을 딸이 알아주니 됐다’고 말해 가슴이 찡했다”고 전했다. 5월에 방영할 교육방송 다큐멘터리 을 준비 중인 조혜정 PD는 “세상을 이끌어가는 힘은 90%가 엄마인 것 같다”며 “프로그램을 위해 만나본 많은 엄마들이 자신을 위한 목소리를 내는 것을 사치라고 생각하는 모습을 보고, 나 역시 엄마지만 엄마는 인간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신이 모든 곳에 존재할 수 없어 엄마를 내려보냈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곁에는 늘 엄마라는 천사가 있다.
경기 불황의 찬바람을 이겨낼 온기는 엄마뿐인 듯하다. 2008~2009년을 관통하는 문화계 키워드로 ‘엄마’가 떴다. 신경숙의 소설 , 연극 , 영화 등 문화 전 영역에서 엄마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쏟아지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시절 고개 숙인 아버지를 위로하는 흐름이 있었던 것과 비슷하다. 세계적인 경기 불황으로 모두가 어렵다는 지금, 헌신과 희생 또는 강인한 생명력의 상징인 엄마의 등장이 의미심장하다. 이나영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모성 다시 보기’ ‘모성 격려’라는 담론이 있는 게 확실하다”고 말한다.
신경숙, 공지영… ‘모성이 주는 위로’대중문화 속 영원한 소재인 가족에서 엄마를 주목한 건 연극이 먼저다. 지난 1월 막을 내린 연극 는 불행한 삶을 비관해 자살하려는 딸과 이를 말리는 엄마의 이야기를 다뤘다. 1983년 미국에서 초연된 작품은 한국에서도 깊은 울림을 뽑아냈다. 오랜만에 연극 무대에 선 나문희의 열연까지 보태져 는 전회 객석 점유율 95%라는 성적을 거두며 막을 내렸다. 원하고 원망하는 사이인 엄마와 딸의 관계는 연극 에서도 이어졌다. 중병에 걸린 딸과 마지막 순간을 함께 보내는 엄마의 이야기가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자신밖에 몰랐던 못된 딸과 이 세상에서 딸을 낳은 것이 가장 보람 있는 일이었다고 말하는 친정엄마가 이별을 앞두고 나누는 대화는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두 연극 모두 인내하고 희생했던 전통적인 엄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 작품이다. 을 쓴 고혜정 작가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줄 수 있는 게 엄마라고 하지 않나. 관객은 자식이 삶의 희망이고 이유였던 엄마 세대를 보며 엄마처럼 사는 게 얼마나 큰 희생을 요구하는지 깨닫고 공감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가족을 위해 희생하며 인고의 세월을 보낸 엄마는 신경숙의 소설 에도 등장한다.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로 시작하는 소설은 엄마의 존재를 잃어버린 듯 잊고 살아온 사람들을 반성하게 만드는 힘을 보여준다. 자식들이 고향으로 내려오는 일이 번거로울까봐 생일을 맞아 서울로 상경한 엄마는 서울역에서 아버지의 손을 놓쳐 사라진다. 전단지를 붙이며 엄마를 찾아나선 가족들은 저마다의 기억으로 엄마의 삶을 되돌아본다. 아버지가 기억하는 엄마는 “사람들은 아내가 지어내는 밥이 따뜻하다고 했다” “아내의 손은 무엇이든 살려내는 기술을 가졌다” 등으로 표현된다. 엄마가 ‘따뜻함’ ‘보살핌’이라는 단어로 연결되는 존재임을 드러내는 예다. 는 큰딸·큰아들·남편·엄마의 시점으로 엄마를 되돌아보는 독특한 서술 방식을 보여준다. 딸은 ‘너’, 아들은 ‘그’, 아버지는 ‘당신’으로 표현하며 엄마만이 ‘나’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부엌에 있는 게 좋았냐는 ‘너’의 질문에 엄마가 “부엌을 좋아하고 말고가 어딨냐? 해야 하는 일이니까 했던 거지. 내가 부엌에 있어야 니들이 밥도 먹고 학교도 가고 그랬으니까. 사람이 태어나서 어떻게 좋아하는 일만 하믄서 사냐? 좋고 싫고 없이 해야 하는 일이 있는 거지”라고 말하는 대화에서도 자신의 욕망을 거세한 엄마의 상처가 가슴을 아프게 한다. 미처 몰랐던 엄마의 면면을 새겨보면서 소설은 엄마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을 불러온다.
엄마가 딸에게 쓴 응원 메시지인 공지영의 산문집 도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책으로 주목받으며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김정운 명지대 교수(문화심리학)는 “엄마의 품으로 회귀하는 현상은 감당할 수 없는 상태의 불안감에서 나타난다”며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이 분명했던 IMF 시절과 달리 위기의 원인과 극복 방법이 불확실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기댈 수 있는 대상으로 엄마를 주목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영미 문화평론가도 “엄마가 대세라는 흐름 대신 아버지가 보이지 않는 현상이 더 흥미롭다”며 “과거에 아버지를 주목한 건 가족 안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어서였는데 지금처럼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는 불안한 상황에선 가족이 해체돼도 흔들리지 않는 엄마의 모성에 기대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영화에서도 엄마의 희생적인 삶을 들여다보는 시도가 이어진다. 5월 개봉 예정인 봉준호 감독의 는 철부지 아들을 살인죄에서 구하기 위해 세상과 싸우는 엄마의 이야기가 줄거리다. ‘국민 엄마’ 1세대로 통하는 김혜자가 엄마를, 원빈이 아들을 연기한다. 올 하반기 개봉 예정인 정기훈 감독의 는 유난스러운 성격의 딸과 늘 티격태격하는 엄마가 시한부 삶을 통보받은 뒤 딸과 화해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억척스러운 엄마는 김영애가, 딸은 최강희가 맡는다. 지난해 5월 과의 인터뷰에서 봉준호 감독은 “다들 엄마가 있는데 엄마는 도대체 어떤 존재냐, 엄마란 존재는 과연 무엇이고 어디까지 갈 수 있냐를 얘기하고 싶다”고 말했다.
TV 속 엄마는 더 다층적이다. 자식을 위해 헌신하는 전통적인 엄마가 있다면 자기 욕망에 충실한 엄마들도 보인다. 문화방송 일일극 에서 수자(김창숙)는 혼자 힘으로 자식들을 키워낸 인고의 어머니상이다. 박사까지 공부시킨 아들이 밥벌이를 못한다고 장모에게 구박받는 모습에 속이 상하고, 철부지 큰딸이 남편에게 이혼당하고 사는 모습에 억장이 무너진다. 착하고 똑똑하게 자라줬던 막내딸마저 애 딸린 남자에게 시집가겠다고 해서 속이 까맣게 탄다.
하지만 희생적인 엄마상도 변화하는 중이다. 지난해 종영했던 한국방송 주말극 에서 한자(김혜자)는 당연시되는 엄마의 역할에서 탈출하려는 시도를 보여 사회적 이슈를 낳았다. 반면 아버지보다 냉정하고 강인한 카리스마를 보이는 엄마들도 등장한다. SBS 에서 종합병원 부원장인 나혜주(김해숙)는 아들 선우(신현준)에게 뇌의학센터를 맡기기 위해 음모를 꾸민다. 김해숙은 문화방송 아침드라마 에서도 자폐아인 아들을 위해 며느리도 돈을 주고 사는 ‘끔찍한’ 모성애를 보여준다. 한국방송 에서 각각 명진그룹 총수인 한명인(최명길)과 신화그룹 총수인 강희수(이혜영)로 나오는 두 엄마는 ‘가모장’ 역할을 하는 철의 여인이다.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며 사회적으로 진취적인 삶을 사는 엄마들이지만 비뚤어진 모성으로 자식들과 갈등을 빚기도 한다. 이나영 교수는 “그동한 가부장제를 떠받들면서도 보이지 않았던 엄마와 엄마의 노동이 가시화돼 평가받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만, 엄마의 모성을 낭만화하며 강한 여성을 비판하는 수단으로 쓰이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강한 여성 비판하려 이용 말아야”가족 해체주의 시대에 가족에 대한 천착은 문화적 퇴행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엄마를 조망하는 작품들이 전통적인 모성애의 강조로 이어지진 않는다. 계간지 봄호에서 신경숙은 “는 엄마에게 위로받자는 게 아니라 엄마를 위로하자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소설 속에서는 희생적인 삶을 살아온 엄마를 다시 보게 만드는 반전이 있다. 엄마들의 상처와 아픔을 어루만지는 다큐멘터리도 제작 중이다. EBS는 5월에 3부작 다큐멘터리 을 방영할 예정이다. 프로그램을 준비 중인 조혜정 PD는 “기획 과정에서 만난 많은 엄마들이 엄마라는 역할 속에서 상처가 깊었다”며 “엄마도 행복하려면 한 인간으로서 존중받아야 함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지금 엄마가 주목받는 것은 사회가 모성을 띠고 자신을 품어줬으면 하는 사람들의 바람이 묻어난 현상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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