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 별로 나이 들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많이 듣지만, 나도 어쩔 수 없이 나이가 먹었다는 것을 느끼는 때가 있다. 바로 개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따라 웃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다. 내가 보기에 이제까지 코미디 프로그램에는 두 번의 전성기가 있었다. 배삼룡·이기동·구봉서·서영춘이 활약하던 시절이 첫 번째 전성기요, 김형곤·심형래·김미화·김한국이 화면을 누비던 시절이 두 번째 전성기다. 그 시절에 비하면 요즘 코미디는 모든 면에서 질적 수준이 외려 낮아졌다. 솔직히 그렇지 않은가?
그런 내 생각을 일거에 뒤엎어버린 충격적 사건이 있었다. 언젠가 버스를 타다가, 젊은이들이 하는 얘기를 엿듣게 되었다. 뭘 보다가 왔는지 그중 하나가 말하기를, “야, 썰렁해. 옛날 김형곤·심형래 개그 수준이야.” 우리 세대를 열광시켰던 그 옛날의 개그를 요즘 세대는 ‘썰렁’하게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비로소 그게 결국 세대 간의 취향의 차이에 불과하며, 내게 코미디 프로그램의 ‘퇴화’로 보였던 것이 어쩌면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진화’나 ‘발전’의 현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말장난 위주의 개그가 전부인 줄 아는 후배 개그맨들을 보면 안타깝죠.” 어느 인터뷰에서 개그맨 이봉원이 한 말이다. 그도 나처럼 최근의 코미디에 불편함을 느끼는 모양이다. “요즘 코미디는 코미디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즉흥적이죠. 말장난 위주의 개그를 하는 후배들은 자신을 ‘개그맨’이라고 부르기가 쑥스러울 것 같습니다.” 브라운관 복귀를 준비하는 그는 “옛날 콩트를 부활”시켜 “옴니버스 형식으로 꾸민 상황 코미디로 승부”하겠다고 말한다. 과연 이 복고풍 전략이 젊은이들에게 먹힐 수 있을까?
SBS (2003), 문화방송의 (2006), 한국방송 2TV의 (1999). 현재 각 방송사를 대표하는 이 개그 프로그램들은 모두 스탠딩 공개 코미디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새로운 형식의 효시는 역시 가장 긴 역사를 가진 . 이 코너의 성공은 결국 다른 방송사들의 코미디 포맷마저 바꾸어놓는다. 이 포맷은 과거 대학로의 무대에서 실험적으로 행해지던 스탠드업 코미디를 TV로 고스란히 옮겨온 것으로, 원래 개그맨 전유성의 제안에 따라 1회에 한해 파일럿 형식으로 방영됐다가 시청자의 반응이 좋아 정식 방송으로 편성됐다고 한다.
포맷이 변하면 코미디의 내용과 형식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누군가 ‘위키피디아’에 올려놓은 기사를 읽어보니, 당시 는 “과거의 와 같은 기승전결식 고정 코미디가 아닌 빠른 리듬과 빠른 코너의 개편”으로 “신세대에게 충분한 어필을 받았다”고 한다. 게다가 관객을 앞에 데려다놓고 하는 공개 코미디이다 보니, 콩트의 연극적 완결성보다는 당연히 현장의 관객과 호흡하는 즉흥성이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가 폭발적 인기를 끌면서 코미디의 형식 자체를 바꾸어놓은 것은, 그것의 강화된 즉흥성과 연출의 신속성이 ‘신세대’의 취향에 들어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옛날 코미디는 ‘고도를 기다리며’과거의 기승전결식 코미디는 선형적으로 전개되는 스토리의 마지막에 찾아오는 반전에 묘미가 있었다. 가령 최양략의 ‘고독한 사냥꾼’의 경우, “내가 이 카페를 즐겨 찾는 까닭은 여기에 오면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 때문이지”라고 시작했다가, 마지막에 “에구, 에구, 그날 난 비 오는 날에 먼지가 나도록 맞았다”로 끝난다. 하지만 스탠딩 코미디는 종종 이렇다 할 반전의 모멘트 없이 매 순간 웃음의 포인트를 만들어낸다. 반전을 기다리는 구세대에게 이런 코미디는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는’ 인간만큼 허무하게 느껴진다. 서사적 맥락 없이 튀어나오는 순간적 말장난도 구세대에게는 그저 허탈할 뿐이다.
신세대가 그런 형식의 코미디에 열광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매체 환경의 변화로 신세대의 지각 방식은 과거와 달라졌다. 1930년대에 발터 베냐민은 영화의 몽타주 기법이 인간의 지각을 산만하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막이 오르면 막이 내릴 때까지 선형적으로 이어지는 연극과 달리 영화는 숏들의 조립으로 이루어진다. 몽타주는 영화, TV, 광고 등 오늘날 시각문화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그 결과 대중의 지각은 산만해졌다. 3초 안에 사로잡지 않으면 바로 채널을 돌리는 버릇을 가진 신세대를 사로잡으려면, 당연히 매 순간 웃음의 포인트를 만들어내야 한다.
희극은 플롯이 시간축을 따라 인과적으로 전개된다. 스탠딩 코미디는 이미 20세기 예술에 나타난 서사의 파괴가 대중문화의 현상이 된 것을 의미한다. 중요한 것은 서사의 시간적 전개의 끝에 찾아오는 급전의 깨달음이 아니라, 순간순간마다 터져나오는 이미지의 전복, 뉘앙스의 일탈, 의미의 전환이다. 텍스트는 시간적으로 전개되나, 이미지는 공간적으로 제시된다. 문자문화의 끝자락을 입은 구세대는 코미디에서 플롯의 시간적 전개와 반전을 기대하나, 이미 영상문화의 홍수 속에 사는 신세대는 플롯이 흐르지 않는 영원한 현재 속에서 순간마다 튀어나오는 이미지의 돌발을 즐기려 한다.
문자문화의 종언과 더불어 제2차 구술문화가 시작되었다. 관객과 분리된 무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정통 연극이 문자문화에 속하는 현상이라면, 연기자와 관객이 한데 어우러져 서로 대거리를 주고받는 탈춤은 구술문화에 속하는 현상이다. 정통 연극의 구조는 강한 자기 완결성을 갖는다. 전체 플롯의 진행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에피소드는 반드시 빠져야 한다. 하지만 탈춤과 같은 구술문화적 형식은 짜임새가 느슨하다. 그것의 구성은 논리적으로 잘 연결되지 않는 에피소드들의 기계적 접합에 가깝다. 코미디 형식에 일어난 변화는 이러한 매체 환경의 변화, 그로 인한 대중의 지각 방식의 변화의 결과라 할 수 있다.
풍자와 해학 사이한 언론운동 단체에서 를 2008년 ‘나쁜 예능 프로그램’으로 꼽았다고 한다. 이유는 “여성 비하와 막말, 외모 비하, 가학성”이다. 발끈한 황현희가 한국방송 연기대상에서 우수상을 받은 기념으로 “개그맨들이 아이디어 회의를 하는 걸 한 번이라도 보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받아쳤다. 개그 프로그램에 과도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요구할 필요는 없지만, 방송에서 사회적 편견을 그대로 드러내는 말장난을 들을 때면 솔직히 마음이 편하지 않다.
흔히 풍자와 해학을 구별한다. 풍자는 ‘남을 아프게 찌르는 것’이다. 풍자에는 웃는 사람과 아픈 사람이 따로 존재한다. 이 때문에 그것은 사회적 비난을 받아야 할 현상이나 인물만을 겨냥해야 한다. 반면 해학은 상대의 가벼운 약점을 들춰내는 것이다. 남을 아프게 하겠다는 악의가 없기에 공격을 받는 대상도 함께 웃게 된다. 개그맨들의 특정 발언이 가끔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이 구별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여성 비하나 외모 비하는 물론 해학의 형식을 취하고는 있으나, 그 효과는 풍자처럼 애먼 사람을 아프게 할 수 있다.
보수적인 사회에서 사회적 풍자의 길이 사실상 가로막혀 있다 보니, 희극에 내재된 공격성이 쓸데없는 방향으로 흐르는 것일까? “너희들 오토바이 타는 형들 부럽지? 가스 마시는 형들 부럽지? 걔들 지금 오토바이 타고 가스 배달하고 있어.” 이런 개그를 들으면서 대중은 폭소를 터뜨린다. 하지만 오토바이 타고 배달하며 열심히 사는 청년들은 이런 비웃음을 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교양과 반성이 없는 개그는 쓸데없이 비열해질 수 있다.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독어독문과
<hr> <font size="3">개그 달인의 심리게임</font><font color="#A341B1">‘반전 유머’는 인간의 가장 고등한 ‘지적 활동’ 중 하나…
지난 10년간 ‘열등한 존재’를 당당함으로 반전시켜</font><font color="#1153A4">[정재승]</font>
21세기 대한민국 개그의 현주소는 일요일 저녁 9시 한국방송 에서 발견된다. 특정 집단에 대한 풍자나 노골적인 성적 농담을 거세당하고도, 매주 온 국민의 어깨를 들썩이게 하는 그들의 개그는 가히 달인 수준이다.
일요일 저녁 혼자 TV 앞에 앉아 조용히 와 맞서려는 시청자라면 대박 웃음을 낚긴 어렵겠지만, 한국방송 녹화장에서 를 직접 방청하면 개그가 주는 웃음 외에 ‘감동’도 얻을 수 있다. 녹화 전 분위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방청객과 함께 벌이는 즐거운 현장 개그, 예상 외로 적은 NG와 쉴 틈 없이 진행되는 코너들, 녹화 뒤 개그맨들이 무대에서 선보이는 개인기 퍼레이드, 그리고 웃을 준비가 돼 있는 따뜻한 관객들. 재미있는 TV 프로그램은 혼자 볼 때보다 여럿이서 함께 볼 때 무려 30배나 더 많은 웃음이 터져나온다는 심리학자 로버트 프로빈 교수의 연구 결과가 거짓이 아님을 방청객 모두는 체험하게 된다.
스탠딩으로 웃기기 어려운 이유(Laughter: A Scientific Investigation·2000)로 잘 알려진 웃음 연구의 대가 로버트 프로빈 교수(미 메릴랜드주립대 심리학)의 연구는 토크쇼나 리얼 버라이어티 장르에 비해 같은 스탠딩 개그가 얼마나 어려운지 잘 설명한다.
그는 대학 캠퍼스에서 웃고 떠드는 학생들 1200명의 대화 내용을 분석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사람들이 대화 도중에 웃는 게 농담이나 재미있는 얘기 때문인 경우는 10~20%에 불과하며, 대부분 친구의 근황이나 자신이 겪은 일상적인 경험을 주고받을 때라는 것이다. 가장 큰 웃음이 터진 대화들을 분석해봐도 그다지 포복절도할 내용은 아니었으며, 농담을 듣는 사람보다 농담을 하는 사람이 1.5배 이상 더 많이 웃었다.
이 연구 결과는 우리에게 웃음은 ‘유머에 대한 생리적인 반응’이 아니라 ‘인간관계를 돈독하게 해주는 사회적 신호’라는 메시지를 전해준다. 친하거나 호감이 가는 상대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즐거워 웃는 것이지, 농담을 주고받아야만 웃음이 터지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토크쇼나 리얼 버라이어티에선 유머러스한 농담이 차지하는 비중이 생각보다 높지 않다. 그에 비하면, 일상적인 경험담 없이 농담 자체로 웃겨야 하는 나 는 ‘유머의 진검승부’가 아닐 수 없다.
는 웃음을 유발하는 심리 전략이 매 코너에 잔뜩 녹아 있는 ‘유머의 교과서’다. 그중 가장 매력적인 전략은 기대감 배반이 주는 ‘반전의 웃음’이다. 평범한 대화와 인트로로 예측 가능한 ‘전형적인 상황’을 만들었다가 뒤통수 치는 결말로 반전의 웃음을 주는 방식이다. 뒤통수를 얼마나 세게 치는지가 개그 수준을 결정한다. 착한 남자가 등장해 한 여성에게 잘해주지만, 이내 등장한 ‘나쁜 남자’는 의외의 반응을 보인다. ‘악성 바이러스’에서는 연주자들이 기상천외한 곡들을 연주한다. ‘할매가 뿔났다’ ‘독한 것들’ ‘달인’ ‘안상태의 뿐이고’ 모두 반전이 주는 재미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전형적인 코너들이다.
‘타이밍’의 명수들과학자들은 반전을 ‘모순 이론’으로 설명한다. 논리적으로 쉽게 연결되지 않거나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질 때 사람들은 갈등(혹은 모순·incongruity)을 경험하고 그것이 해소(resolution)되면서 웃음을 터뜨린다는 것이다. 의 개그맨들이 뛰어난 것은 반전의 핵심인 ‘타이밍’을 매우 잘 맞춘다는 점이다. 이건 뛰어난 연기력을 필요로 하는데, 기대감이 한껏 고조된 상황에서 ‘적절한 타이밍’으로 예상을 뛰어넘는 반전을 만들어내는 것은 ‘개그 달인의 내공’이 없으면 어려운 것이다. NAN방송사 안상태 기자가 평범한 목소리로 뉴스를 리포트하다가 멈추고 정적이 흐르면, ‘뒤통수를 치는 반전’이 나오기도 전에 관객이 웃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피터 더크 박사는 ‘반전 개그’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 지능 발달에 매우 유용하다고 주장한다. 피터 더크에 따르면, 일단 유머가 시작되면 우리의 대뇌는 다양한 결말을 예측해보며 점점 긴장 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러다가 결말이 엉뚱하게 마무리되면, 아주 짧은 순간이나마 그동안의 예측들을 머리에서 지우고 새로운 틀 안에서 전체적인 이야기를 재구성한다. 예상치 못한 결말이 전체 이야기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시할 때, 사람들은 유쾌한 웃음을 터뜨린다. 바로 이 짧은 반전의 순간에, 뇌에서는 복잡한 정보 처리 과정이 일어나며, 창의력처럼 고등한 사고 과정을 담당하는 뇌 영역이 활발히 활동한다는 것이다. ‘반전 유머’는 인간의 가장 고등한 ‘지적 활동’ 중 하나이니, 학부모들이여, 대한민국의 모든 청소년들에게 시청을 허하라!
가 나 에 비해 단연 돋보이는 대목은 ‘적절한 음악(효과음) 사용’이다. 기대감을 유발하고 극적 반전의 해소를 최대화하기 위해 코너마다 음악이 사용되는데, 개그맨들의 연기만큼이나 중요할 때가 많다. ‘나쁜 남자’나 ‘순정만화’ ‘도움상회’ ‘연애 컨설턴트 박지선’ 같은 코너에 음악이 없다고 상상해보라.
찰리 채플린이나 배삼룡, 심형래 등의 바보 개그 전통도 여전히 에서 발견된다. 플라톤 이래 수많은 철학자들이 주장한 ‘우월성 이론’에 따르면, 사람들은 타인에게서 실수나 결점을 발견하거나, 혹은 뭔가 모자라는 듯한 행동을 보게 되면 웃는다. 예를 들어 ‘미쳤어’의 박휘순이 자학 개그를 한다거나, 김대희가 ‘바보 대구’를 연기할 때, 우리가 터뜨리는 웃음에는 ‘너는 나보다 멍청해’라는 우월감이 내재적으로 깔려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의 발전에서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열등한 존재’들의 당당함이다. 얼굴이 못생긴 여성이 놀림감이 되는 개그는 예나 지금이나 있어왔지만, 박지선과 신봉선, 강유미 등 요즘 개그우먼이 이영자와 다른 점은 그들에게선 열등감과는 거리가 먼 ‘건강함과 당당함’이 있어서다. ‘변 선생’의 변기수나 ‘준 교수’의 송준근, 의 김늘메처럼 동성애나 트랜스젠더를 연상시키는 캐릭터를 연기하면서도, 시청자가 사회적 편견 없이 건강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한 점은 지난 10년 동안 한국 코미디가 이룩한 성과다. 실컷 웃고 나서 프로그램이 끝나면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던 ‘불편함’이 줄어들었으니 말이다.
‘황현희 PD의 소비자 고발’이나 ‘박대박’처럼 당연하다고 여겨진 ‘친숙한 것’들을 다시 들여다보게 만드는 ‘낯설게 하기’, ‘도움 상회’나 ‘할매가 뿔났다’처럼 사회적 이슈나 ‘버릇 없는 아이’ 같은 세태를 비꼬는 풍자 개그도 고급 개그의 한 예다.
앞으로 360년간 기대할 수 없는 것
어느 시민단체가 를 ‘나쁜 방송’으로 선정한 것이 인터넷상에서 논란이 됐다. 에 여전히 사회적 약자 비하, 북한 비하, 외모 비하, 자학 및 막말 사용 등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내용이 포함돼 있는 것은 사실이다. “웃음이란 열등한 타인을 통해 뜻밖의 우월감을 느꼈을 때 나타나는 말초적인 승리감에 불과하다”라고 토머스 홉스가 360년 전 자신의 책 (Leviathan·1651)에서 얘기한 걸 보면, 앞으로도 360년간 개그 프로그램이 정치적으로 올바르길 기대하기란 무리일 것 같다.
차라리 시청자에게 “개그는 개그일 뿐 오해하지 말자!”라고 ‘개그를 바라보는 태도’를 제대로 일러주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 이거 제대로 못 배우면, 나중에 웃자고 한 얘기에 죽자고 덤벼드는 ‘똥·오줌 구별 못하는’ 인간들이 되고 만다.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바이오및뇌공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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