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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고통스런 사람에게 병 주고 약 주고


원망과 자책이 서로 갉아먹어 없어지기를 기다려야지, 김경미의 <고통을 달래는 순서>

제744호
등록 : 2009-01-15 14:40 수정 : 2009-01-16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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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미의 <고통을 달래는 순서>
글 쓰는 이들에 대해서 애초 그 무슨 환상 같은 것 품어본 바 없지만, 사람 사는 동네이기는 마찬가지라, 여기에도 남의 말 하기 즐기는 이들 있다는 것 확인하는 일은 유쾌하지 않네. 삶이라는 게 뜻대로 되지 않는 사업임을 깊이 깨달은 이들이 문학을 한다고 알고 있는데, 제 삶이 그랬다면 타인의 삶 역시 그러했으리라 따뜻하게 넘겨짚을 줄 알아야지, 타인의 삶을 함부로 해석·재단·평가하는 데 거리낌 없는 이들이 문학을 한다면 이건 의아스러운 일. 누군가의 한숨 하나에도 참 많은 맥락들이 있을 터인데, 하물며 수십 년의 삶 속에는 얼마나 많은 불가피함들이 뒤엉켜 있겠나. 잔혹하고 쓸쓸한 그 불가피함들에 겸허한 사람은 남의 말 함부로 못할 것이네. 이런 생각들 하느라 연말연시의 어느 순간들이 쓸쓸했는데, 이런 시를 읽었네.

“몇날이고 수도승처럼 눈만 감다가 모처럼 나섰다/ 나서다가 누군가가 머리에 박은/ 10센티짜리 대못을 꽂은 채 떠도는/ 고양이 뉴스를 봤다/ 빼려고 얼마나 부볐는지/ 핏속 못이 조금 헐거워졌다고 했다 사람이 동물을/ 얼마나 낙담시키는지 이미 잘 알고 있다// 다정한 모임 속 네가 갑자기 내 머리에 못을 박았다/ 그 대못 얼버무리려 괜한 웃음을 웃느라/ 이마와 코가 헐거워졌다,/ 너무 가깝거나 멀어 몹쓸/ 사이도 아닌데 인간이 인간을 얼마나 낙담시키는지/ 이미 잘 알고 있다// 잘 알고 있는데도 뺨으로 눈썹이 흘러내렸다/ 나는 확실히/ 사람과 잘 안 맞아 어떻게 사람이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죽은 척하는 순간/ 고양이가 내 두 손을 지목한다”(‘그날의 배경’ 전문)

김경미의 네 번째 시집 <고통을 달래는 순서>(창비 펴냄)에 실려 있는 시. “이미 잘 알고 있다”는 말의 낮은 울림도 좋지만, 마지막 반전 앞에서 생각이 많아졌지. 사람에게 상처받은 내가 ‘대못 꽂힌 고양이’인 줄 알았더니만 실은 ‘대못 꽂은 그 누군가’였다는 깨달음인데, 이를 시인들의 흔해빠진 반성 같은 것으로 읽지 않는 게 좋겠네. 마음의 고통은 ‘원망’과 ‘자책’의 결합으로 생겨나는 것임을 이 시는 알려주네. 나에게 자책이 없을 때 타인의 못질은 그저 황당한 분노를 낳지만, 어떤 자책이 문득 함께할 때 그 못질은 깊은 고통을 낳는 것이지. 그 자책은, “비천과 험담 그치지 않는 입을 만났다/ 찻집 화장실에 가서 입을 몇 번이고 헹궜다/ 다 헹구고 거울 속 입안을 들여다보니 혀가 두 개였다”(‘무언가를 듣는 밤’ 중)에서처럼, 나에게도 속으로 맞장구친 ‘또 하나의 혀’가 있지는 않았던가 하는 자책이겠지.

“토란잎과 연잎은 종이 한 장 차이다 토련(土蓮)이라고도 한다// 큰 도화지에 갈매기와 기러기를 그린다 역시 거기서 거기다// 누워서 구름의 면전에 유리창을 대고 침을 뱉어도 보고 침으로 닦아도 본다// 약국과 제과점 가서 포도잼과 붉은 요오드딩크를 사다가 반씩 섞어 목이나 겨드랑이에 바른다// 저녁 해 회색삭발 시작할 때 함께 머리카락에 가위를 대거나 한송이 꽃을 꽂는다 미친 쑥부쟁이나 엉겅퀴// 가로등 스위치를 찾아 죄다 한줌씩 불빛 낮춰버린다// 바다에게 가서 강 얘기 하고 강에 가서 기차 얘기 한다// 뒤져보면 모래 끼얹은 날 더 많았다 순서란 없다// 견딘다”(‘고통을 달래는 순서’ 전문)

고통을 달래려고 앉아서는 시인이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아니네. 토란잎과 연잎, 갈매기와 기러기, 뱉는 침과 닦는 침, 포도잼과 요오드 같은 것들은 앞에서 말한 ‘원망’과 ‘자책’의 변주들이겠지. 고통을 음미하다 보면 어느 순간 너에 대한 원망과 나에 대한 자책이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지. 네가 나빠서이기도 하지만 내가 못나서이기도 하다는 생각, 너를 더 힘껏 미워하는 일은 고스란히 나를 더 학대하는 일이 되고 만다는 낭패감. 그러니까 고통인 거지. 마음을 짓누르는 고통이란 분노·증오·경악 따위와는 다른 것. 그러니 고통을 달래는 일 막막하네. 그저 원망과 자책이 서로를 갉아먹어 제로가 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순서란 없다, 견딘다.” 사람에게 못질당해 고통스러운 사람에게, 이 시는 병이 되려나 약이 되려나.

2009년이 밝았건만 무언가 달라질 거란 기대 갖기 힘드네. 위정자들이 분골쇄신의 고배가 아니라 자화자찬의 축배를 들었으니, 우리는 다만 공화국 시민의 책무를 다하면서 2009년의 책을 읽고 2009년의 글을 쓸 따름. 이럴 때 이런 시집 나온 건 괜찮은 일. 병 주는 뜨거운 시집도 있고 약 주는 지혜로운 시집도 있는데, 마음이 넉넉하지 않은 요즘 같은 때에는 전자는 답답하고 후자는 가소로워, 병도 주고 약도 주는 맑은 책이 가장 진실에 가까워 보이기 때문. 그렇다고 이 시집이 뜻만 앞서고 말 부림이 둔한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아서, 본래 길었을 문장을 두 번 세 번 깎아낸 흔적들 곳곳에 있으니 읽는 기분 내내 팽팽하네. 근래 이렇게 귀퉁이 많이 접은 시집도 드물어 미처 다 옮겨 적지 못했지만, 뜻이 가물가물 녹아내린 ‘겹’ ‘만유인력’ ‘애인도시’ ‘일몰의 기억들’ 같은 시들의 담담한 향기가 오히려 내게는 더 각별했다는 것 끝으로 말씀드리고 싶네.

신형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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