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불십년 반증이런가. 김어준(40)씨가 1998년 7월 를 창간하며 서른 살 총수에 앉은 지 10년. 그는 모순과 비리, 몰상식이 있는 곳이면 어디로든 ‘똥침’을 벼리고 겨눴다. 보는 이들은 포복절도했고 맞은 이들은 낮게 포복했다. 그새 이름값 불렸으되 살집도 불었고, 방송사 마이크를 ‘똥침’의 보조도구로 쓰고도 있다. 오리무중 인터넷 환경에서 정면 돌파로 일군 10년, 그는 권불십년이 성립하지 않는 여집합의 공간에 서 있다. 인터넷 여행사를 운영하다 외환위기로 빚더미를 쌓았던 그이기에 성취는 시리우스보다 빛난다.
(푸른숲 펴냄)는 ‘ESC’ 등 여러 매체에 연재한 상담을 묶은 책이다. 에 실린 글을 엮거나 다른 이들과 함께 썼던 책을 빼면 김씨의 첫 단독 저서인 셈이다. 일흔다섯 꼭지 ‘고민-답변’을 읽다 보면 “사유는 질문과 대답으로 이뤄진다”는 철학자 포이어바흐의 명제가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김씨는 단도직입의 대가답게 머리말에다 책의 알짬을 담았다. “행복할 수 있는 힘은 애초부터 자기 안에 내재되어 있다는 거, 그러니 행복하자면 먼저 자신에 대한 공부부터 필요하다는 거, 이거 꼭 언급해두고 싶다. 세상사 결국 다 행복하자는 수작 아니더냐.” ‘자신이 자신에게 이방인’이라는 것, 곧 자기 객관화를 못한 어른은 어른이 아니며, 현실을 직시하기는커녕 이미지에 홀려 불행을 스스로 증폭한다는 게 김씨 주장의 척추다. “(삶의) 주도권을 온전히 자신이 소유해야 한다.”
“당신은 정숙한 부인 대신 바람난 아내, 윤리적 엄마 대신 불륜한 부모, 소녀적 가슴앓이 대신 욕정의 관계를 택했다. 그럼 당신, 그런 사람이다. …선택의 누적분이 곧 당신이다. …자기 선택과 그 결과로서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그로 인한 비용 감당하겠다면, 그렇다면, 그 지점부터, 세상 누구 말도 들을 필요 없다.” 애 키우는 주부인데 10년 만에 만난 옛 친구와 빠진 불륜을 어떻게 해야 하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물론 이런 말도 빠뜨리지 않는다. “다 조까라 그래… 당신, 생겨먹은 대로 사시라, 그래도 된다.” 거칠고 날카로우며 야박하기까지한데도 그가 내뱉는 ‘구라’는 혀에 착착 감긴다.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씨는 그 이유를 ‘천성적 균형감각’에서 찾은 바 있다. “그의 균형감각은 경쾌함을 진중하게 표현할 줄 아는 모차르트의 재능처럼 다분히 천성적이다.”() 김씨는 파격으로 가되 파탄을 내지는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가족관계에서 겪는 천태만상 오욕칠정에 대해서, 윤리·도덕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예의를 해법으로 제시한다. ‘명문대 다니는 동생이 유학을 가겠다는데 경비를 제 결혼 비용에서 축내야 할지 고민스럽다’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다 큰 새끼가 제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어디서 어리광인가. 계속 징징거리면 죽통을 날려버려라.” 그러곤 넌지시 “존재를 질식케 하는 그 어떤 윤리도, 비윤리적이다. 관계에서 윤리는 잊어라. 지킬 건 인간에 대한 예의다”라고 규정한다.
험악하게 내지른 뒤 차분한 논리로 달래고는 다시 익살을 내질러, 웃지 않을 도리 없는 ‘김어준식 삼단논법’을 완성하는 게 그 특유의 화법이다. 가령 이런 식의 재치. “가장 효과적 이별. 그녀와 친구들 앞에서 친구를 칭찬하라. 그녀와 비교하며. 외모만.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말고 떠나라. 잡혀 죽는 수 있다.” 또는 이런 식의 눙치는 솜씨. “그녀 집안이 엄청난 부자다. 그리고 당신은 독립적인 인격체가 되는 것 따위는 관심 없고 돈이 너무 중요하다. 그런데 그녀와 결혼하면 바로 그 돈을 얻을 수가 있다. 그러면 뭐, 꾹, 참아야지.”
밑줄 그으라 외치는 잠언 여럿정현종 시인의 시를 빌려 말하면, 김씨는 ‘쓰러지는 법이 없는… 가볍게 떠오를 준비가 되어 있는… 탄력의 나라의 왕자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김씨는 탄력 못지않게 탄탄한 논리를 내장하고 있다. 실제 그는 꽃병에 꽃을 꽂듯 책 곳곳에, 밑줄 긋고 외라고 유혹하는 듯 잠언 여럿을 새겨넣었다. “기대를 저버리는 연습 없이는, 평생을, 남의 기대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쓰고 만다”거나 “‘누군가의 자식’이 아니라 ‘누군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제 삶을 스스로 거머쥐라는 뜻이다. 또 “푸념으로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므로 “선택은 언제나 선택하지 않은 것을 비용으로 한다”며 선택과 책임은 짝패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한다. “(진짜) 문제는 (자신이) 이기적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과연 어디서 그 한계를 긋느냐 하는 거”라거나 “딱 반이 항상 가장 공평한 건 아니라는 거. 사실 모든 인간관계가 다 그렇다”는 문장에선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가 또렷하다. 예의 전복적 사고 또한 드물지 않으니 “나이 들어 가장 비참할 땐 결정이 잘못됐다는 걸 알았을 때가 아니라 그때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했던 걸 깨달았을 때다” “사랑이란 모든 걸 내 뜻대로 할 수 있어 하는 게 아니라, 어떤 것도 내 뜻대로 되지 않건만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어서, 하는 거다” “애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어른은 보고 싶지 않은 것까지 보는 거다”라고 단정한다. 그래도 그것이 섣부른 생각으로 읽히지 않는 게 김씨 문장의 매력일 것이다.
10년의 열쇳말은 아마도 ‘엽기’일 것이다. 그것은 김씨가 2000년 에서 말한바 “발상의 전환, 주류의 전복, 왜곡된 상식의 회복, 발랄한 일탈”을 뜻한다. ‘명랑사회’ 구현을 위해 행복해지기, 그 해답의 처음은 자기 반성이요 끝은 자존감이라는 보편적 상식에 이 책은 기대고 있다. 그것은 영국의 소설가 아이리스 머독이 남긴 문장을 불러낸다. “나의 행복은 슬픈 얼굴을 하고 있다. 너무도 슬퍼서, 다년간 나는 그것을 불행이라 여기고 내몰았던 것이다.”
전진식 기자 한겨레 편집2팀 seek1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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