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현존 세계체제, 자본주의 세계경제로부터 또 다른 세계체제 혹은 체제들로의 이행기에 살고 있다.” 세계체제론자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가능한 대안의 역사적 탐구’란 의미의 신조어 ‘유토피스틱스’를 제안하면서 진단했던 내용이다. (창비, 1999)에서 그는 ‘역사적 사회주의’ 몰락의 교훈을 되새기며 우리가 앞으로 50년 동안 민주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체제를 위해서 근본적인 역사적 선택을 해야 한다고 전망한 바 있다.
월러스틴의 신작 (창비 펴냄)는 그 문제의식을 그대로 연장하고 있다. 이번에 그가 분석하고 있는 것은 현존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또 다른 이름인 ‘유럽적 보편주의’다. 월러스틴의 기본 입장은 변함이 없다. 지금은 이행의 시기라는 것. 16세기에 형성되어 지금까지 지속돼온 하나의 긴 시기가 현재 종말을 고하고 우리는 새로운 시기로 진입하고 있다. 어떤 시기가 될 것인가? 그것은 알 수 없으며 장담할 수도 없다. “앞으로 다가올 20년에서 50년 동안의 싸움”을 통해서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싸움의 결과에 따라 기존 세계제체보다 더 사악한 불평등의 세계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아프리카 세네갈의 시인이자 정치가 생고르의 표현대로 ‘서로 주고받는 만남의 세계’가 될 수도 있다. 월러스틴은 이것이 유럽적 보편주의와 보편적 보편주의 사이의 이데올로기 투쟁을 통해서 결정될 것이라고 말한다.
유럽적 보편주의란 강자들의 편파적이고 왜곡된 보편주의다. 그것은 인권과 민주주의, 서구 문명의 우월성, 시장에 대한 복종의 불가피성처럼, 얼핏 자명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결코 자명하지 않은 관념들로 구성된다. 근대 세계체제의 역사는 유럽의 국가와 민족이 세계의 다른 지역으로 팽창해나간 역사였고 이것은 자본주의 세계경제 건설에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알다시피 이 팽창은 군사적 정복과 경제적 수탈, 그리고 엄청난 불법 행위를 수반한 것이었고 그러한 과정에서 이익을 챙긴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팽창을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를 개발해 보편주의로 포장했다. 어떤 논리들인가?
먼저, 개입할 권리를 주장하는 논리다. 개입은 언제나 강자의 권리인 바, 유럽인들은 타자의 야만성과 보편적 가치에 맞지 않는 관습의 근절, 무고한 양민의 보호, 그리고 보편적 가치의 전파 따위를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개입의 권리를 정당화했다. 16세기에는 자연법과 기독교, 19세기에는 문명화의 사명, 그리고 20세기 후반과 21세기에는 인권과 민주주의가 그 구실이고 명분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개입과 제재 조치가 강자들에게 정복당한 사람들만큼이나 강자들에게도 적용되지 않는다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 사담 후세인이 재판정에 서야 한다면, 키신저와 부시도 기소돼야만 한다. 자신들을 열외로 놓는다는 점에서 유럽적 보편주의는 진정한 보편주의에 미달한다.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독창적인 인식론으로서의 오리엔탈리즘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지배세력의 원리를 구현하는 보편주의와 피지배세력의 속성으로 지칭되는 특수주의 사이의 이분법을 근거로 한다. 오리엔탈리즘이 비판과 극복의 대상이 된 지 오래이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유럽적 보편주의의 중핵을 구성하는 과학적 보편주의는 상대적으로 비판에서 면제돼왔다. 하지만 월러스틴이 보기에 자본주의 세계체제와 현재의 대학제도, 그리고 지식의 구조는 서로 분리되지 않은 긴밀한 관계에 놓여 있다. 중세의 유럽 대학과는 다른 근대적 대학이 성립하는 것은 19세기 중반의 일이며 세계 전역에서 대학제도가 융성하게 되는 것은 1945년 이후다. 그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경제의 팽창에 따른 결과였다. 그리고 근대 세계체제 운영에서 고급 기술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지면서 자연스레 자연과학은 인문학을 제치게 되었다. 하지만 이제 세계경제의 장기 침체와 함께 대학제도의 사회경제적 토대는 약화됐고 과학적 보편주의의 권위 또한 도전받게 됐다. 그럼으로써 확인되는 것은 과학적 보편주의의 이데올로기성이다. 월러스틴은 지식인들이 거짓된 가치중립성의 족쇄를 벗어버리고 대안으로서의 보편적 보편주의를 모색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이행의 시기를 사는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이다.
로쟈 인터넷 서평꾼 http://blog.aladdin.co.kr/mram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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