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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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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목마름이 필요하다

등록 2007-12-21 00:00 수정 2020-05-03 04:25

급진적이고 다원적인 민주주의를 위하여, 샹탈 무페의

▣ 로쟈 인터넷 서평꾼 http://blog.aladdin.co.kr/mramor

“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이” “숨죽여 흐느끼며” 남몰래 적던 이름이 있었다. “타는 목마름으로” 그의 만세를 부르던 때가 있었다. 그랬던가 싶은 기억을 돌이켜보면, 우리가 적은 이름이 ‘민주주의’였고 우리가 부르던 만세가 “민주주의여 만세”였다. 그리고 20년, 어느새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말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이따금 묻는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안녕한가를.

그러자니 먼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물어야겠다. 혹은 한 정치철학자를 따라서 ‘민주주의 혁명’이 무엇인가를. 클로드 르포르에 따르면 민주주의 혁명이란 권력의 자리를 ‘텅 빈 장소’로 만든 사회적 제도의 새로운 기원이다. 이 민주주의 혁명 이후에 우리는 5년에 한 번씩 그 텅 빈 자리에 앉혀놓을 권력의 대행자를 뽑아왔다. 간혹 못해먹겠다고 푸념도 늘어놓는 자리이지만 한꺼번에 열두 명이나 나서서 좀 앉게 해달라고 간절히 호소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이 역설의 자리는 어떻게 마련되고 또 유지되는 것인가.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의 공저 (1985)으로 포스트마르크스주의 논쟁의 물꼬를 튼 바 있던 샹탈 무페의 이어지는 두 저작 (후마니타스 펴냄)과 (인간사랑 펴냄)은 ‘정치적인 것’의 의미와 ‘민주주의의 역설’에 새삼 주목하도록 해준다. 먼저, 그가 말하는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은 사회의 특정 분야를 지칭하는 ‘정치’(politics)와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 자체이기 때문이다.

“슈미트와 함께 생각하고 슈미트에 반대하여 생각하고 슈미트의 비판에 맞서 그의 통찰을 자유민주주의를 강화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 자신의 목표라고 말할 정도로 무페가 적극적으로 참조하고 있는 이는 독일의 정치철학자 카를 슈미트이다. 그런 슈미트에 따르면, 정치적인 것이란 적과 친구를 가르는 것이다. 즉, 누가 적이고 누가 친구인가를 판별하고 구분하는 것이다. 한데 이것이 어째서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이 되는가? 어떤 수준이든 간에 자기 정체성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나’와 대립되는 ‘타자’가 먼저 주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한발 더 나아가 집단적 정체성이 형성되려면 ‘우리’와 ‘그들’의 구분은 불가피하다. 즉, ‘그들’이라는 외부는 ‘우리’를 구성하기 위한 필수적인 전제가 된다(그래서 ‘구성적 외부’라고 부른다). 이때 ‘그들-우리’ 관계는 정치에서 자연스레 ‘적-친구’ 관계로 전화된다. 이 적-친구 관계의 갈등과 적대는 항구적인 것이기에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사회적 객관성은 이러한 관계와 조건의 산물이기에 궁극적으로 정치적인 것이다.

사정이 그렇다면, 민주주의 사회에서 모든 사회적 행위자는 자신의 의견과 주장이 갖는 특수성과 한계를 인정할 때 더 ‘민주적’이 될 수 있다. 민주적 사회는 사회적 관계의 완벽한 조화가 실현된 사회가 아니다. 국민 전체의 ‘승리’나 ‘행복’은 가능하지 않으며, 그것을 말하는 것은 반민주적인 기만이다. 민주적이라는 것은 어떠한 사회적 행위자도 전체를 대표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승인을 가리킬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권력과 적대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다는 환상을 버리고서 권력 관계의 실재를 인정하며 그것을 변형해나가려 노력하는 것이 라클라우와 무페가 말하는 ‘급진적이고 다원적인 민주주의’ 프로젝트이다(다만 덧붙이자면, 우리의 ‘적’에는 ‘적대적인 적’과 ‘우호적인 적’이 있어서 ‘그들-우리’의 관계는 적대적 관계만이 아니라 경합적 관계도 형성하며 이를 통해 ‘경합적 다원주의’로서 민주주의가 작동하게 된다). 대선은 그런 민주주의의 경연장이다. 샹탈 무페에 따르면 민주주의의 진정한 위협은 적대감이 아니라 합리성과 중립성을 가장한 합의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시, ‘타는 목마름’이고 ‘치 떨리는 노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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