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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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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의 비누상자

등록 2008-05-23 00:00 수정 2020-05-03 04:25

‘예술의 종말’에 대한 아서 단토의 답…자유의 확장,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는 시대

▣ 로쟈 인터넷 서평꾼 http://blog.aladdin.co.kr/mramor

‘예술의 종말’이란 말을 들어보셨는지? 그거 뭐 유행 아닌가? (근대)문학, 철학, 역사 가릴 것 없이 떼로 종말을 고했다고 하는데, 예술이 끝났다는 게 굳이 새로운 소식은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럼 더 구체적인 질문을 재차 드린다. 예술은 언제 종말을 고했다고 보시는지? 그리고 그 종말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보시는지? 너무 과한 질문인가? 얼핏 이런 질문에 답하려면 나름의 예술관과 예술철학으로 무장해야 할 듯싶다.

하지만 미국의 철학자이자 미술비평가 아서 단토에 따르면, 너무도 유명한 팝아티스트 앤디 워홀과 함께 상자 하나만 잘 기억해두면 된다. 비누 상자다.

‘예술’이라고 흔히 번역되는 ‘아트’(Art)가 여기서는 좁은 의미의 ‘미술’을 뜻하므로 엄밀하게 말하자면 ‘미술의 종말’이라고 해야겠지만, 어쨌거나 단토가 ‘예술의 종말’을 충격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은 1964년의 한 전시회에서다. 그는 당시 미국 뉴욕 이스트 74번가의, 마치 재고품 창고 같은 모양새의 스테이블 갤러리에서 슈퍼마켓에서나 진열돼 있을 법한 ‘브릴로 상자’가 층층이 쌓여 있는 걸 보고 미적 혐오감을 넘어서는 철학적 흥분을 느낀다(‘브릴로’는 청소용 세제의 브랜드다. 이 비누 상자 옆방에는 켈로그 상자들도 쌓여 있었단다).

물론 워홀이 슈퍼마켓에서 이 상자들을 사다가 미술관으로 그냥 옮겨놓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 상자들은 그가 브릴로 상자를 모방해서 직접 제작한 것이다. 즉, 진짜 브릴로 상자는 골판지로 만들어졌지만 워홀의 브릴로 상자는 합판으로 만들어졌다. 문제는 이 재질의 차이가 육안으로는 식별이 가능하지 않다는 점이다. 해서 겉보기에는 똑같은 두 종류의 상자가 존재하게 되었다. 하나는 단순한 상품 상자로서의 브릴로 상자, 그리고 다른 하나는 워홀의 팝아트 작품으로서의 브릴로 상자. 하지만 이 두 상자는 보는 것만으로는 식별되지 않는다. 흔히 무엇이 예술작품인가는 ‘보면 안다’고 말하지만 이 경우엔 ‘봐도 모른다’. 이것이 결정적이다. 미술이 시각(눈)의 문제에서 사고(머리)의 문제로 전환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미술은 더 이상 외관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의 문제가 된다.

그렇다면 철학적으로 따져보자. 똑같아 보이는 두 상자가 어떻게 해서 하나는 그냥 상자이고 다른 하나는 예술작품이 되는가? 어떤 사물이 예술작품인가 아닌가는 대체 누가 어떤 기준으로 결정하는가? 이 새로운 문제에 직면해 단토가 내놓은 대답이 ‘예술의 종말론’이다. 그리고 이 주장은 1965년에 발표한 ‘예술계’란 논문과 1981년에 출간되고 최근 번역돼 나온 (한길사 펴냄)을 통해서 제시된다. 그가 말하는 예술의 종말이란, 워홀의 브릴로 상자가 말해주듯이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기에 이제는 더 이상 예술에 대한 정의가 가능하지 않다는 인식에서 제기된다. 예술에 대한 정의가 더 이상 가능하지도 또 유효하지도 않다면 거기서 예술의 역사가 종말에 이르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은 나쁜 소식일까? 그렇지만도 않다.

사실 국내에는 단토가 1995년에 이 문제를 다시금 총정리해서 내놓은 (미술문화 펴냄·2004)가 먼저 소개됐다.

이 책에서 단토는 헤겔주의자로서 예술의 종말이 갖는 의미를 이렇게 정리했다. “예술의 종말은 예술가들의 해방이다. 그들은 이제 어떤 것이 가능한지 않은지를 확증하기 위해 실험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들에게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미리 말해줄 수 있다. 예술의 종말에 대한 나의 생각은 오히려 역사의 종말에 대한 헤겔의 생각과 비슷하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역사는 자유에서 종말을 고한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예술가들의 상황이다.”

헤겔에 따르면, 역사는 하나의 중대한 목적을 갖는다. 곧 자유의 확장이다. 모든 인간이 자유로운 시대에 도달하게 되면 역사는 종언을 고한다. 그것은 달리 역사의 완성이기도 하다. 예술 또한 마찬가지여서, 모든 일상적인 것들이 예술작품으로 변용될 수 있고 누구나 예술창작자가 될 수 있다면 예술은 종말에 이른다. 예술의 민주주의가 곧 예술의 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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